brunch

매거진 책과 얽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은희 Oct 07. 2021

존재와 부재의 보존

<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자서전과 허구의 합성어인 '오토 픽션' 장르의 이 소설은 아니 에르노의 삶의 궤적 중 한 지점을 확대해서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그 시기를 파헤치듯, 객관적이고 건조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내용이나 책 제목에서 드러나는 '열정'이 뜨거움으로 읽히지 않는 이유는 그 시간 속에 있지만 그 시간 속에 살고있지는 않은 시점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듯하다. 시간은 흐르고, 흐르는 시간 속에 많은 기억들은 흐릿해지겠지만 삶의 전환점에서 과거의 경험을 현재 쓰는 글의 불쏘시개로 만듦으로써 그 시절에 다시금 존재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그렇게 조금은 담담하게 사랑의 열정을 '사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런지.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책에 씌어 있는 그 밖의 다른 내용들은 그 사람과 다시 만날 때까지의 빈 시간을 메워주는 수단일 뿐이었다.


*나는 종종 내가 저지르거나 당할 다소 비극적인 사고나 질병을 상상해서 그것으로 내 욕망을 저울질해보는 버릇이 있었다. 이는 상상을 통해 그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알아봄으로써 내 욕망이 운명에 대항할 만큼 큰지 그 정도를 측정해보는 방법이었다.


이제 재킷만 걸치면 저 사람은 떠나겠지. 나는 나를 관통하여 지나가는 시간 속에 살고 있을 뿐이었다.


하나하나 어떤 몸짓이나 순간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그 물건들을, 그것들이 이루는 생생한 무질서를 지금 상태 그대로 보존하고 싶었다.


가끔 이러한 열정을 누리는 일은 한 권의 책을 써내는 것과 똑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면 하나하나를 완성해야 하는 필요성, 세세한 것까지 정성을 다한다는 점이 그랬다.


어느 순간 갑자기 이런 말들이 내 열정의 실상과는 아무 상관없는 쓸데없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 알 수 없는 감정 속에서 무언가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요즈음 나는 내가 매우 소설적인 형태의 열정을 지닌 채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관계에서 시간적인 개념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그저 존재 혹은 부재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언제나'와 '어느 날'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면서 열정의 기호들을 모으고 있었다.


내가 예술작품에 관심을 갖는 경우는 그것이 열정과 관계가 있을때뿐이었다.


내가 그 사람을 떠올리는 행위와 환각 사이에,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나의 기억과 광기 사이에는 차이점이 전혀 없는 듯했다.


날이 밝아도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아무런 계획이 없는 무의미한 하루가 내 앞에 버티고 있었다. 시간은 더이상 나를 의미 있는 곳으로 이끌어주지 못했다. 단지 나를 늙게 할 뿐이었다.


A와 만나기 바로 전에 내가 묵은 장소에 있었던 물건들을 펀듯이 한 가지씩 열거했다. 그렇게 하면 과거를 다시 살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하루하루를 시간을 헤아리며 지냈다.

그렇게 과거를 되새기다보니, 왜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옮겨가듯 지금 현재에서 그 시절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인지 의문이 생겼다.


글을 쓰는 시간은 열정의 시간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모든 일이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해 이루어졌던 그때에 머물고 싶었기 때문이다. 첫 페이지부터 계속해서 반과거 시제를 쓴 이유는, 끝내고 싶지 않았던 '삶이 가장 아름다웠던 그 시절'의 영원한 반복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그것들이 서서히 스러지기 시작한다. 살아 있는 텍스트였던 그것들은 결국은 찌꺼기와 작은 흔적들이 되어버릴 것이다. 언젠가 그 사람도 다른 사람들처럼 내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겠지.


이 글을 쓰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글에는 자신이 남겨놓고자 하는 것만 남는 법이다.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나는 내 온몸으로 남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이 글은 그 사람이 내게 준 무엇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노벨문학상 #수상후보 #단순한열정 #아니에르노 #오토픽션

매거진의 이전글 부의 추월차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