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규 선생님을 기리며
<이제 다시 詩作입니다>
去南方村 거남방촌
原作 鄭鎭圭 원작 정진규
漢譯 朴秀慶 한역 박수경
望殘一把暻 망잔일파경
欲製言之衣 욕제언지의
鄙陋煩碎兮 비루번쇄혜
但歸空手已 단귀공수이
남쪽 마을에 가서
몇 뼘 쯤의 햇살을 바라며
말씀의 입성을 지어내고자 했는데
비루하게 이러구러한 일들 뿐
다만 빈 손일 따름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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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마을에 가서
정진규(1939~2017)
가고 싶던 남쪽 마을에 당도했다 거기엔 아직 몇 뼘 쯤의 햇살이 남아 있으리라 믿었던 나의 생각은 언제나처럼 잘못이었다 늦가을 저녁 거리엔 옛날의 객사(客舍) 하나 오슬오슬 감기를 앓고 있었다 옛날의 말들이 비루먹은 당나귀들이 마른 풀만 씹고 있었다 몸을 뎁히고자 잔기침을 하며 나도 소주를 마셨다 찬 나무의자에 앉아 생두부를 씹었다 다른 나라 사람처럼 이 마을의 거리를 혼자 걸어다녔으며 찬 빗방울 두엇 이마에 떨어질 때는 동구밖까지 나가 있었다 끝내 찾고자 했던 것 남아있을 햇살 두어 뼘쯤 어렵게 끊어내어 그대에게 보내드릴 말씀의 입성 한 벌 따듯이 지어내고자 했던 것 잘못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대여 이번에도 나는 빈손이다 다만 빈손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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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히 머언 어느 날, 어느 선배님과 수원에 있는 시상이라는 찻집에서 시상의 어여쁜 사장님과 함께 정진규 선생님을 만나뵈온 적이 있더랬지요.
젊잖으신 신사분이셨던 것으로 기억 되는데, 친구가 정진규 선생님의 시를 전해주어 가물가물해진 기억의 그림자가 소환되었습니다.
직설인 듯한 비유의 맛이 기깔난, 정진규 선생님의 <남쪽 마을에 가서>라는 시를 오언절구로 한역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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枙 와
- 靑蛙 朴秀慶 청와 박수경
朱線一行戶籍上 주선일행호적상
胸部痛産㦧手指 흉부통산참수지
痕能消失過二十 흉능소실과이십
根魂殘樁化硬枙 근혼잔장화경와
端雅志士非月壇 단아지사비월단
華嚴將帥非丹靑 화엄장수비단청
從枙妙香光彩發 종와묘향광채발
萬枙竟成生指紋 만와경성생지문
옹이
호적에 생긴 붉은 상채기 한 줄
왼쪽 가슴 아파서 낳은 아픈 손가락 하나
스무 해가 지났으니 흉터가 사라졌을 법한데
영혼의 그루터기에 박힌 옹이가 되었다
단아한 선비의 달항아리도 아니고
화려하고 장엄한 장수의 단청도 아닌데
옹이에서 묘한 향기가 나고 광채가 돈다
만 개의 옹이가 마침내 삶의 지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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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이에 대하여
ㅡ 정진규
십 년도 더 넘게 넘어져 있던 한 그루 꽃나무 투병을 끝낸 여자와 다시 만났다 그는 다시 일어섰다 한 그루 대추나무와 같았다 열매나 이파리도 달지 않았지만 이상한 향기가 났다 저 여자를 대패질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생각했다 저 여자의 깊은 속 어디엔 아픈 상채기들 그가 거느리던 깊은 어둠들 엉기고 엉켜붙은 단단한 옹이들이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어디쯤서 나의 대팻날이 덜컥 걸려 버릴 것이다 나의 대팻날이 깊이 상할 것이다 이가 빠질 것이다 못 쓰게 될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그러하다 할지라도 너는 그러할 것인가 저 여자를 대패질할 것인가 그러하리라 나는 대답했다 이상한 향기 탓이었다 내 영혼의 집의 갈비뼈 내 영혼의 집의 대퇴골 서까래나 기둥 그런 단단한 말씀들의 옷을 내가 입기엔 아직도 멀지만 한 그루 대추나무가 되기엔 아직도 멀지만 그를 만나자 나는 힘이 생겼다 이상한 향기 탓이었다 내 연약함이 내 대팻날이 덜컥 못쓰게 다친다 할지라도 옹이를 만들자 다치고 다쳐서 나도 옹이를 만들자 이상한 향기를 만들자 시인이란 옹이가 많을수록 좋다 저러한 옹이는 우리의 자본이다 나는 처음으로 굳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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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친구가 이번에는 정진규 선생님의 <옹이에 대하여>를 보내주었습니다. 그 시를 읽는 순간 제 안의 수 만 개의 옹이들이 꿈틀거리며 아우성을 쳤습니다.
하여 정진규 선생님과 그 친구를 위시하여 삶의 길벗님들께 시 한 수 지어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