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품 성, 고요할 정, 뜻 정, 편안할 일, 마음 심, 움직일 동, 귀신 신, 고달플 피)
守眞志滿逐物意移
수진하면 지만하고,
축물하면 의이니라.
(지킬 수, 참 진, 뜻 지, 찰 만, 쫓을 축, 만물 물, 뜻 의, 옮길 이)
토를 달아놓고, 한자의 음훈을 알았으니 그대로 직역을 해보겠습니다.
성품이 고요하면 뜻이 편안해지고,
마음이 움직이면 정신이 고달퍼지니라.
참된 것을 지키면 뜻이 가득 차고,
만물을 좇으면 뜻이 옮겨지니라.
직역만 가지고서는, 정확한 의미는 놓아두더라도,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조차 알기 어렵습니다.
2. 여느 서당에서의 풀이
'성정'(性靜) 부분의 성(性)을 풀이하면서, <중용>(中庸)의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을 가지고 옵니다. <천자문>을 배우려는데, 사서삼경을 들이대니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천자문>의 첫 부분, '천지현황'(天地玄黃)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게 생겼습니다. '검은 하늘'이 무엇이고, 그 하늘이 명한 것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렇게 여느 서당에서는 성현(聖賢)들이 한 말을 가지고 와서 풀이하고자 애썼습니다. 저는 띄엄띄엄 성현들의 말씀을 보기는 했는데, 새겨듣지 못하는 부분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제 식으로 조금씩 뜯어읽는 일을 해보았습니다. 흔히 그와 같은 것을 '개똥철학'이라고 합니다.
3. 청와의 풀이, 性靜情逸心動神疲 대목
'성'(性)은 성정(性情)이라고 할 때의 성입니다. 조선시대 도학자들은 불변하는 하늘(天)을 가정해 놓고 그것이 명한 불변하는 성(性)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 모릅니다. 다만 그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원론자들)이 있고, 그것이 무엇인지 회의하는 사람들(일원론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저는 후자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성'(性)은 뭐고 '정'(情)은 뭐라고 보느냐 하는 겁니다.
성현들의 말씀에서 한 가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면 됩니다. 즉, '성'(性)은 천(天)이 명(命)한 그 무엇인지 모르겠고, <'성'이란, '정'(情)이 내면화되면서 형성되어 가는 '성품'을 말합니다>. 본성이 선한지 악한지도 모르겠고, 그의 성품이 어떠한지는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겁니다. 성품을 달리 심성이라고도 하고, 우리말로 '됨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情)은 살아가면서 느끼는 온갖 느낌과 생각들입니다. 거기에는 희노애락과 같은 정서적 느낌뿐만 아니라, 인의예지와 같은 도덕적 느낌, 시시비비와 같은 논리적 느낌에 이르기까지 모든 느낌들을 정이라고 합니다. 모든 정신활동을 정이라 하는 겁니다.
이제 풀이해 보겠습니다.
性靜情逸心動神疲
성이 정하면 정이 일하고,
심이 동하면 신이 피하니라.
<성품(性)이 고요한 사람은 마음 쓰는 일이 요란스럽지 않고, 심성(心)이 이리저리 발현되면 마음 쓰는 일이 번다해 지는 법입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오리까? 자기가 무엇 때문에, 왜 그리 마음을 쓰고 있는지 알아차리면 됩니다. 해야할 일이면 더 정진해야 하고, 쓸 데 적은 일이라면 과감히 끊어내면 됩니다.
4. 청와의 풀이, 守眞志滿逐物意移 대목
이 대목의 핵심은 참(眞)과 의지(意志)입니다. 의지부터 보겠습니다.
의(意)와 지(志) 모두 뜻 의, 뜻 지라고 풀이를 하기 때문에 헷갈리게 되어있습니다.
저는 지(志)를 지향(志向)이라고 풀이합니다. 내면화되어 있는 성(性)은 어떤 지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는 의(義)로운 것을 향하고자 하고, 누구는 이(利)로운 것을 향하고자 합니다. 성품이 이러저러하기도 해서, 때로는 이런 지향성이 나타나기도 하고, 다른 때는 저런 지향성이 나타나기도 하는 겁니다.
저는 의(意)를 의식(意識)이라고 풀이합니다. 성품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지향성을 가지고 발현될 때, 이런 저런 언어적인 활동을 동반하면서 이루어집니다. 언어적 활동은, 그 언어에 대한 느낌이 가득한 경우일 수도 있고, 그저 시끄러운 말잔치일 수도 있습니다.
의(意)와 지(志)를 함께 일컬을 때, 의지라고 합니다. 내면의 성품이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어떤 언어적 활동에 의해서 발현되는 작용을 의지라고 합니다.
이제 참(眞)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저는 무엇이 진리(眞理)인지 모릅니다. 다만, 사람들이 진리라는 말 속에 어떤 느낌, 어떤 의미를 채워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습니다.
제게 있어 참이란, 거짓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거짓이란 말은 <겉짓>에서 왔다고 봅니다. 속에 있는 것과 다른 모습일 수도 있고, 속과 겉이 같은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흔히 속과 겉이 다르기 때문에 '거짓'이라고 하면 나쁜 느낌을 갖게 되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 속에 채워서 가지고 있는 것이 곧 자기자신입니다. 그 자기 자신 속에 채워진 것을 자기의 '살림살이'라고 합니다.
이제 풀이해 보겠습니다.
守眞志滿逐物意移
수진하면 지만하고,
축물하면 의이니라.
<내면에 채워져 있는 심성을 고수하면 의지가 그 채워져 있는 것으로 가득차게 되고, 외부의 물질을 좇다보면 의지가 이랬다 저랬다 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오리까? 자기 내면이, 심성이, 성품이, 됨됨이가 어떤 것으로 채워져 있는지 돌이켜 보면 됩니다. 그것을 자기 성찰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