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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 대한 해부학적 고찰

한강의 서랍 속 한 뼘의 저녁

by 청와

해부극장 2


한강


나에게

혀와 입술이 있다.


그걸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견딜 수 없다, 내가


안녕,

이라고 말하고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고 말하고

정말이에요,

라고 대답할 때


구불구불 휘어진 혀가

내 입천장에

매끄러운 이의 뒷면에

닿을 때

닿았다 떨어질 때/1)


*


그러니까 내 말은,


안녕.


어떻게 생각하세요.


진심이야,


후회하고 있어.


이제는 아무것도 믿고 있지 않아./2)


*


나에게

심장이 있다.


통증을 모르는

차가운 머리카락과 손톱들이 있다.


그걸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나에게 붉은 것이 있다, 라고

견디며 말한다

일 초마다 오므렸다 활짝 펼쳐지는 것,

일 초마다 한 주먹씩 더운 피를 뿜어내는 것이 있다/3)


*


수년 전 접질렸던 발목에

새로 염증이 생겨

걸음마다 조용히 불탈 때가 있다


그보다 오래전

교통사고로 다친 무릎이

마룻장처럼 삐걱일 때가 있다


그보다 더 오래전 으스러졌던 손목이

손가락 관절들이

다정하게

고통에 찬 말을 걸어온다/4)


*


그러나 늦은 봄 어느 오후

검푸른 뢴트겐 사진에 담긴 나는

그리 키가 크지 않은 해골

살갗이 없으니

물론 여위었고

역삼각형의 골반 안쪽은 텅 비어 있다

엉치뼈 위의 디스크 하나가

초승달처럼 곱게, 조금 닳아 있다


썩지 않을,

영원히 멈춰 있는

섬세한 잔뼈들


뻥 뚫린 비강과 동공이

곰곰이 내 얼굴을 마주 본다

혀도 입술도 없이

어떤 붉은 것, 더운 것도 없이/5)


*


몸속에 맑게 고였던 것들이

뙤약볕에 마르는 날이 간다

끈적끈적한 것

비통한 것까지

함께 바싹 말라 가벼워지는 날


겨우 따뜻한 내 육체를

메스로 가른다 해도

꿈틀거리는 무엇도 들여다볼 수 없을


다만 해가 있는 쪽을 향해 눈을 잠그고

주황색 허공에

생명, 생명이라고 써야 하는 날


혀가 없는 말이어서

지워지지도 않을 그 말을/6)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46-51쪽. /번호는 제가 임의로 넣었습니다.)


[몸말로 읽기]


1. 시에 대한 해부학적 전제


<해부극장>에서는 ‘눈’에 관한 해부학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해부극장 2>에서는 ‘말’에 관한 해부학적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해부극장 2>는 행간으로 구분된 25개의 작은 단락, *표로 구분된 6개의 큰 단락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큰 단락은 두 개의 단락 씩 각각 묶어 볼 수 있습니다. 1)과 2)는 ‘혀와 입술’에 관해, 3)과 4)는 ‘심장, 머리카락과 손톱, 발목, 무릎, 손목과 손가락 관절들’에 관해, 5)와 6)은 ‘뢴트겐 사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의 순서대로 인물의 말 1)과 2)를 먼저, 생물의 말 3)과 4)를 다음에, 사물의 말 5)와 6)을 나중에 이야기해야겠지만, ‘말’의 발생을 생각했을 때 거꾸로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를 통해 존재의 위계와 말의 발생사, 존재와 언어의 중첩 구조를 들여다 보려고 합니다.


2. 사물의 언어 - 몸말


‘뢴트겐 사진에 담긴’ ‘해골’은 ‘혀도 입술도 없이 / 어떤 붉은 것, 더운 것도 없이’ 시적 자아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혀와 입술, 속으로 흐르는 붉고 더운 것들을 메스로 그 모든 것들을 다 갈라낸다 해도, ‘썩지 않’고 ‘영원히 멈춰 있는’ 사물과 같은 ‘해골’이 있습니다.


해골인 사물이 주고받는 말은 ‘혀와 입술’의 말, ‘붉고 더운’ 말이 아닙니다. ‘다만’ 모든 사물과 사물이 음양의 관계 속에서 활(活, 生起)-동(動, 振作)-운(運, 周旋)-화(化, 變通)하면서 주고받는 모든 것이 곧 ‘사물의 말’입니다. 그 사물을 혜강 최한기는 활동운화지기(活動運化之氣)라고 했습니다. 용어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의미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생명의 떨림과 흐름’이라는 말로 그 말을 대신합니다. 활동운화지기가 ‘생명의 떨림과 흐름’이라는 말의 광의의 개념, 근본적인 개념입니다.


모든 사물, 만물이 곧 기(氣)이고, 그 기가 곧 생명입니다. 그것이 광의의 생명입니다. 그 사물이 활동운화하면서 주고받는 모든 물리화학적 정보를 저는 ‘몸말’이라고 합니다. 몸말은 소위 ‘태초’가 있었다면 그 태초부터 기와 함께 있어온 ‘태초의 말’입니다. 기는, 생명은 말로, 몸말로 존재합니다. 그것이 '생명의 떨림과 흐름'입니다. 그 몸말에 ‘붉고 더운’ 느낌을 담아서 주고받는 일, 혀와 입술로 주고받는 일은, 사물이 온몸으로 몸말을 주고받는 날이 수없이 흐른 뒤 어느 날부터의 일입니다.


3. 생물의 언어 - 뜻말


그러던 어느 날, ‘생명’이라는 말의 협의의 개념에 해당하는 ‘생물’이 탄생합니다. 생명(기)이 무생물(음)과 생물(양)의 생극적(生克的) 관계로 활동운화하는 변화(진화)가 이루어진 겁니다. 이에 생물은 생물의 의지와 감정을 창안해 내기에 이르렀으니, 그 생물의 언어를 ‘뜻말’이라고 합니다. 그 뜻말은 사물이 주고받는 물리화학적 정보에 감정과 의지를 담아서 주고받는 말입니다. 전파에 음성과 영상, 갖은 정보를 담아서 주고받는 오늘을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심장’은 무생물과 대립된 협의의 생명을 상징합니다. 몸말 철학에서는 '생물'이라는 말은 협의의 생명이라고 합니다. ‘통증을 모’른다고 한 말은, 생물이 통증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을 그렇게 한 겁니다. 그렇지만 모든 생물의 통증 즉 고통은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지만, 결국 견디며 살아갑니다. 죽음에 이를 때까지 모든 생물은 자신의 삶을 꿋꿋하게 견뎌냅니다. 온몸에 ‘다정하게 / 고통에 찬 말’을 새겨 넣으면서. 다정한 고통의 역설, 어디서부터 왔을까요?


몸말 철학은 무한한 가능성의 창조적 발현이라는 근본 원리는 우주 모든 것에 적용되는 원리라고 봅니다. 즉 우주 생명은 다정한 고통의 역설 속에 떨림으로 존재합니다. 그 역설은, 밀어내고 싶음과 끌어당기고 싶음 사이에 존재하는 떨림입니다. 즉 사물의 떨림도 그 역설 속에 존재합니다. 생물은 그 역설을 창조적으로 발현

함으로써 뜻말을 창안해 냈을 뿐입니다. 사물과 생물 근본에는 '다정한 고통'이라는 역설이 동시에 흐르고 있는 겁니다. 그 다정한 고통에 대해 몸이 기억하는 몸말, 즉 뜻말에 귀 기울여 합니다. 생물은, 그 다정한 고통을 해석하고, 삶을 견디게 하는 뜻말을 몸말로 주고받습니다.


이것을 몸말 철학은 기일원론을 수용해서, 생극(生克)의 작용이라고 봅니다. 무한한 가능성인 우주는 '그대와 나'의 생극으로 스스로를 창조적으로 생성해 나갑니다. 사물의 몸말을 생물의 몸말로.


4. 인물의 언어 - 입말


동물들이 입으로 내는 소리 또한 ‘입말’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음향’이라고 합니다. 음향은 단순한 의미를 전달하기는 하지만, 인류가 내는 ‘입말’처럼 개념적이고, 창의적인 의미를 전달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생물의 언어’는 ‘뜻말’이라고 하는 겁니다. 즉 인류의 ‘입말’은 생물의 ‘뜻말’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창조적으로 다시 발현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입말’은 음향이 아닌, 음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인류의 음성은 발성기관의 조화(調和)로 이루어집니다. 아설순치후(牙舌脣齒喉), 어금니, 혀, 입술, 이, 목구멍 등이 주고받는, ‘사물의 몸말’의 결과물이 인류의 입말입니다.


인류는 입말을 가지고, 개념과 지식이라는 것을 만들어냈습니다. 개념과 지식이라는 것을 가지고 문화와 문명이라는 것을 만들어냈습니다. 지금의 우리 삶이 그 입말이 창조해낸 결과물이라는 겁니다. 입말은 인간만의 언어입니다. 입말은 뜻말을 형식화하고, 몸말을 이론화합니다.


그런데 이 인간의 입말은, 인간에게 감정적 분열과 존재적 고통을 일으킵니다. 개념적 인식도 좋고, 창의적 생각도 좋습니다. 문제는 소통을 단절시키는 고정적인 관념, 리듬을 깨뜨리는 극단적인 창조에 있습니다. 흐르지 못하고 고인 말, 무엇을 위한 흐름인지 모르는 빈말, 그 관념덩어리, 욕망덩어리의 말에 의해 스스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 인간 문명이라는 겁니다.


이 또한 다정한 고통의 역설입니다. 사물과 생물의 몸말을 창조적으로 발현하는 생극의 작용입니다. 다만 그 생극의 흐름을 온몸으로 느껴보자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지금 우리 삶이 ‘안녕’하냐는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냐는 겁니다.


5. 장자의 호접몽


장자(莊子)는 ‘제물론(齊物論)’에서, 호접몽(蝴蝶夢, 나비 꿈)을 꾼 장자가 꿈에서 깨고 나서, ‘자신이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된 것인가?’라고 했다는 겁니다.


장자의 '호접몽' 얘기는 <장자> 전체를 꿰뚫는 우언(寓言)입니다. '호접몽'의 대전제는, 세상살이가 어차피 모두 '꿈(夢)'이라는 겁니다. 그 꿈속의 '너와 나'가'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이 '미몽(迷夢)'이라는 거지요. '너와 나'를 잊으면(忘我忘物) 시비(是非)가 사라지고, '대몽(大夢)'에서도 벗어나 물아가 일체가 되는 물화(物化)의 세계를 이룬다는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제(齊, 가지런히 한다)' '물론(物論, 다양한 주의주장)', 즉 다양한 주장을 가지런하게 조화시킨다는 거지요. '호접몽'으로 인해 인간 삶의 모든 것이 '꿈'이라는 큰 틀에 갇혀 버린 겁니다. <삶이, 세상이 모두 꿈이다>라는 대전제를 세워놓았기 때문입니다. 그 꿈에서 깨어날 수 있으면, 깨어나면 됩니다.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대전제를 바꾸거나, 대전제에 예외를 두거나 해야 합니다. 그러면 대전제로서는 결격 사유가 되긴 하겠습니다만. 그것이 깨달음이고, 망아망물(忘我忘物)이고 그럴 테지요.


6. 청와의 언어몽


'호접몽'에서 깨어난다 해도 꿈속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럴까요? 깨달음과 망물망아를 통해서, 인간은 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것도 착각일 뿐이고, 심지어 벗어났다고 '말'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말'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철저히 '인간의 언어'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장자가 제기한 '호접몽'의 대전제가 아니라, 청와가 제기하는 언어의 대전제 때문입니다.


‘후회하고 있’어도, ‘아무것도 믿고 있지 않아’도 ‘혀와 입술’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인간의 언어 즉 ‘입말’이라는 꿈속에 살고 있게 되었으니까요.


7. 그러면 어찌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언어, 입말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불교는 방편(方便)이라는 역설(逆說)로, 유교는 정명(正名)이라는 학문(學問)으로 그 입말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저는 '방편적 정명'이라는 과정적 관점을 취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끊임없이 언어를 갈고닦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개념, 名)이 유일한 생각(正名)이라고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 주고받는 느낌과 몸말에 귀 기울여 주는 것이 교감입니다. 그것이 몸말 철학의 감응입니다. 그럴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럴 수 있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 이상의 깨달음을 모두가 이루면 좋겠지만, 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모두가 그것을 다 이루어야하는 것인지도 의문입니다.


또 다시 취생몽사(醉生夢死)를 생각하게 합니다. 살아가는 일은 결국 무엇엔가 취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 진하디 진한 무엇이 '언어'입니다. 그것이 제가 제기하는 '언어몽'입니다. 그런 줄 알기만 하면 벗어날 수도 있을 줄 알았는데, 그 습(習, 濕, 버릇)이 너무 깊습니다. 어찌해야겠습니까? 일단 그런 줄 알아야겠지요. 그 깊은 병에 대한 처방은, 제가 아는 것이라고는 '깨어있어라'라고 하는 선현들의 말씀뿐입니다. 죽을 때까지 '언어라는 깊은 꿈속에서 깨어있기'를 바래야지요.


깨어있음이란, 자아의 각성에서 출발합니다. 자기의 내면을 성찰하는 것은 그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영혼들이 만나서, 서로의 몸말을 나누는 감응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자는 것이 몸말 철학의 제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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