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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대한 해부학적 고찰

한강의 서랍 속 한 뼘의 저녁

by 청와

해부극장*


한강


한 해골이

비스듬히 비석에 기대어 서서

비석 위에 놓인 다른 해골의 이마에

손을 얹고 있다


섬세한

잔뼈들로 이루어진 손

그토록 조심스럽게

가지런히 펼쳐진 손


안구가 뚫린 텅 빈 두 눈이

안구가 뚫린 텅 빈 두 눈을 들여다본다


(우린 마주 볼 눈이 없는걸.)

(괜찮아. 이렇게 좀더 있자.)


* 16세기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해부학자 안드레아 배살리우스의 책. 수년간의 급진적 해부 연구 끝에 인간의 뼈와 장기, 근육 등 정교한 세부를 목판에 새겨 제작했다. 독특한 구도의 해골 그림들이 실려 있다.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44-45쪽.)


[몸말로 읽기]


1. 해골의 발길과 손길과 눈길


먼저 구태여 찾아가서 발길이 닿았습니다. ‘비스듬히 비석에 기대어 서서’ 만나보고 방문, 위문을 하는 겁니다. 발길이란 몸말 철학으로 보자면, 세계에 대한 꼴림입니다. 존재가 지향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섬세한 손길이 닿았습니다. 이마에 손을 얹는다, 이건 일상적으로 열을 짚어보는 행위입니다. 상태를 손으로 진찰하는 행위지요. ‘엄마 손’을 떠올려보자고요. ‘엄마 손’은 그 자체만으로 아이를 진정시키고 위로해주는 구실을 합니다. 그래서 약손이라고도 하나 봅니다. 손길이란 몸말 철학에서, 감응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윽고 텅 빈 눈길이 마주합니다. 이렇게 닿고 마주하는 모든 것을 통해 주고받는 겁니다. 무엇을? 정보라고도 합니다만, ‘느낌’이라는 말을 쓰겠습니다. 그렇게 ‘느낌을 주고받는 모든 짓’을 ‘몸말을 나눈다’고 하겠습니다. ‘눈으로 말해요!’ 온몸으로 말을 나누는 겁니다. 눈길이란 몸말 철학에서, 서로에게 스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괄호), 입이 없고 귀가 없어 들리지는 않아도 온몸으로 나누는 말을 (괄호)로 표현했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괄호)들... 보는 기능이 소멸한 거이 아닙니다.


(우린 마주 볼 눈이 없는걸.)


'안구가 뚫린 텅 빈 두 눈'은 육안(肉眼)을 말합니다.


(괜찮아. 이렇게 좀더 있자.)


왜 괜찮다는 걸까요? 그렇게 있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비로소 진짜 보는 일, 몸말 철학의 감응이 시작된다는 겁니다. 입이 없는 자들이 말하는 법을 알면, 모든 몸이, 모든 존재가 곧 입임을 알게 됩니다.


2. 시이불견(視而不見)


보고도(視) 알아보지(見) 못하는 것을 시이불견(視而不見)이라고 합니다. 육안으로는 보았을지라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말은 알아'보는' 다른 눈이 있다는 말이겠습니다. 그 눈을 일단 심안(心眼)이라 하겠습니다.


'본다'라는 말은 '닿는다'는 말입니다. 빛이 수정체를 통과해 망막에 닿아서 뇌에 전달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물리화학적 주체인 '자신(自身)'이 물리화학적인 대상을 육안으로 보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심안으로 본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감정과 의지적 주체인 '자기(自己)'가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 대상의 감정과 의지를 보는 것이고, 그것에 대해 좋든 싫든, 옳든 그르든, 이러저러한 감정과 의지를 가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함께 살아가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보면서도, 그 세상이 어떤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그 세상에 대해 이러저러한 감정과 의지를 갖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곧 '시이불견'인 겁니다.


감응의 첫 번째 단계마저도 실패하게 되는 겁니다.


3. 견이불관(見而不觀)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 아픈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자기에게도 아픔이 전해진 것 같다고 해보겠습니다. 세상을 '알아보게' 된 겁니다. 세상을 얼핏 둘러보기만 하더라도, 세상은 온통 슬프고 기쁜 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세상이 '마음으로 느껴지게(見)' 된 겁니다. 그렇지만 아직 세상이 왜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그 이치를 깨닫지는(觀) 못했습니다. 마음으로 느껴지기는 하는데, 그 이치를 깨닫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 것을 '견이불관(見異不觀)'이라는 말로 나타내겠습니다.


마음으로 감정(심정)을 느끼는 것과 마음으로 이치를 생각하는 것이 다른 영역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은 심안 가운데 정안(情眼)이 하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자기의 눈이 정안인 겁니다. 이치를 생각하는 작용은 자기 내면에서 의식적(언어적) 활동을 하는 주체인 '자아(自我)'가 하는 일입니다. 자아의 눈을 '혜안(慧眼)'이라고 하겠습니다. 지혜의 눈이라는 말입니다. 혜안은 납득이라고 하는 받아들임입니다.


심안은 정안과 혜안으로 작용한다는 겁니다.


4. 관이불관(觀而不關)


세상을 느끼고(感知) 이해했습니다(認識). 그러면 세상과 만나게 되었나요? 자기가 느끼고, 자아가 이해했으니, 세상과 만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직 세상과 만나려면 마지막 관문(關門)이 남아있습니다. 세상의 마음의 문과 자기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세상과 자기가 비로소 만날 수 있는 겁니다. 세상의 심연(深淵)과 자기의 심연이 이어질 때 그것을 세상과 자기가 만났다고 하는 겁니다. 자기가 세상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세상을 자기의 심연 속으로 들어오게 해야 합니다. 어떻게?


현관(玄關)을 열어야 합니다. 현(玄), 천지현황(天地玄黃)의 그 '현'입니다. 현은 '검다'라는 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깊고 멀다', 즉 오묘(奧妙)하다는 말입니다. 그 천(天)은 자기의 내면 깊은 곳, 심연(深淵)을 말합니다.


그 심연을 '영혼(靈魂)'이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의 영혼 속으로 세상이 들어오게 해야 합니다. 자기가 깊이 열려야 하는 거지요. 그 입구가 현관입니다. 그 현관을 열고 자기 영혼 속으로 세상을 들어오게 하는 것이 바로 관심(關心)이라는 말입니다. 오불관(吾不關), '내가 알 바 아니야'라고 했던 것에서, 세상을 자기 영혼에 받아들여 자기 영혼이 세상의 영혼을 느껴보는 것이 '관심(觀心)'입니다. 그 관심이 몸말의 감응의 개시이고, 스밈의 시작입니다.


그 자기 영혼, 자령(自靈)의 눈을 '영안(靈眼)'이라고 합니다. 자기와 세상의 영안의 눈길이 마주하는 것, 그것을 시에서

'안구가 뚫린 텅 빈 두 눈이 / 안구가 뚫린 텅 빈 두 눈을 들여다본다'

라고 했습니다.


형해(形骸)화하는 육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육신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집착하지 않으면서 육신에 깃든 영혼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선 자기-자신의 이마에 손을 얹고, 자기의 내면에 깃든 자기 영혼, 자기 신명을 만나봐야 하겠습니다.


제 영혼은 지금, 한강의 영혼을 감당하지 못하고, 안드레아 배살리우스의 영혼을 제대로 품지 못해 잡스럽게 복잡합니다.


'괜찮아지겠지요. 이렇게 조금 더 있어보자고요.'


이 말은 죽은 자가 산 자에게,

또는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혹은 한강의 시가 미래의 독자에게

남기는 공명(共鳴)의 유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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