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의 시 읽기
저녁의 대화*
한강
죽음은 뒤돌아서 인사한다.
<<너는 삼켜질 거야.>>
검고 긴 그림자가 내 목줄기에 새겨진다.
아니,
나는 삼켜지지 않아.
이 운명의 체스판을
오래 끌 거야.
해가 지고 밤이 검고
검어져 다시
푸르러질 때까지
혀를 적실 거야
냄새 맡을 거야
겹겹이 밤의 소리를 듣고
겹겹이 밤의 색채를 읽고
당신 귓속에 노래할 거야
나직이, 더없이,
더없이 부드럽게.
그 노래에 취한 당신이
내 무릎에 깃들어
잠들 때까지.
죽음은 뒤돌아서 인사한다.
<<너는 삼켜질 거야.>>
검은 그림자는 검푸른 그림자
검푸른
그림자
*<제7의 봉인>에 부쳐.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28-29쪽.)
<청와의 생각>
1. 자연인의 쓸쓸한 죽음
우리는 죽음을 앞에 두고도 알지 못하면서 살아갑니다. 톨스토이의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가져오지 않아도, 양인자 님이 노랫말을 쓴 <타타타>에 나오듯, ‘한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죽음은 늘 우리의 등 뒤에 있다가, ‘뒤돌아서’ 불쑥 다가오곤 합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모든 생명은 죽어야할 운명’ 앞에 놓인 겁니다. 그 죽음이 언제, 어떻게 오느냐 하는 것이 문제일 뿐, 죽음이라는 것은 언제고 우리를 ‘삼키’고야 말 겁니다.
죽음이 자연인으로서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무상함 또는 쓸쓸함 또는 허무감 같은 겁니다. <너는 삼켜질 거야>라는 그 느낌에 사로잡힌 자연인의 운명에 대한 거부가 ‘아니, / 나는 삼켜지지 않아.’라는 외침입니다.
2. 문명인의 두려운 죽음
어차피 죽어야할 운명이라고 한다면 쓸쓸하고 허무해도 어쩔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운명을 거부하고 싶은 자연인이 새로운 세계를 꿈꿉니다. 죽음 이후의 삶이 또 있다고 하는 꿈입니다.
중세시대 사람들은 고대의 사상과 신화를 바탕으로 고등종교를 창안해 냅니다. 죽음과 맞서는 그 사람들이 창안해 낸 ‘세계관 게임’입니다. 일반인들은 그 ‘세계관’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그 세계관이 삼켜버린 세계에 살게 된 겁니다. 그와 같은 세계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중세인(中世人)’이라 하겠습니다.
종교라고 하는 문화적 유산과 신이라고 하는 추상적 개념이 중세인의 삶에 내면화됩니다. 그럼으로써 ‘심판’이라고 하는 천국과 지옥을 갖은 상상력을 동원해 그려놓음으로써. <죽음 이후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들을 삼키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죽음’은 ‘쓸쓸함’을 넘어 ‘두려움’이라는 것을 무기로 사람들을 집어삼키려합니다.
‘아니, / 나는 삼켜지지 않아.’
운명에 대한 거부였던 이 말은 이제 ‘중세의 세계관’에 대한 거부로 외쳐집니다.
3. 체스판의 운명
서양의 중세인들은 도처에 널려있는 '천지창조'와 같은 고대의 신화들을 가져와, 체스게임과 같은, ‘세계관 게임’을 창안해 냈습니다. 종교적 관점에서는, 모든 사람이 절대적인 신 앞에 평등하다는 논리를 내세워 제국의 다른 신민들도 받아들일 만한, 보편주의의 세계관을 제시해 준 겁니다. 정치적인 관점에서는, 황제는 그 세계관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신분적 지위를 승인받게 됩니다.
이것이 중세시대의 모순입니다. 종교적 보편주의와 사회적 신분제의 야합이 낳은 모순입니다.
‘아니, / 나는 삼켜지지 않아.’
이제 이 말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 중세의 세계관에 대한 거부로 외쳐집니다.
4. 중세의 세계관 게임들
기독교의 세계관은 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세계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신으로 귀결되는 일원론인 것 같지만, 신과 인간의 이원론입니다. 신은 인간을 창조해놓고도 인간을 마음대로 못합니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이원론적 내세를 게임에 도입함으로써, 인간이 모두 신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신에 귀속되는 인간과 신에 대항하는 인간으로 이원화됩니다. 결국은 기독교적 세계관은, 신과 인간, 선과 악의 이원론인 셈입니다. 2의 세계관입니다.
브라만교의 세계관은 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만물은 허상이며, 결국은 모든 것이 브라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됨으로써 만물은 브라만으로 귀결됩니다. 만물에 내재한 아트만이 곧 브라만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에 대해, 브라만교는 깨달음이라는 게임의 규칙을 도입한 겁니다. 결국은 신과 인간은 하나라는 일원론인 셈입니다. 그러나 신이 긍정되고 인간과 만물이 부정되는 1의 세계관입니다.
불교의 세계관은 브라만교의 신마저도 부정합니다. 만물은 자성(自性)이 없다는 겁니다. 어떤 실체를 깨달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겁니다. 브라만교의 아트만 또는 참나라고 하는 것들도 모두 공(空)한 것들이라는 겁니다. 세계관에 0을 도입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기막힌 세계관을 이루어놓고도, 선악(천당과 극락)이니 윤회(영혼과 육체)니 하는 2원론적 세계관을 버리지 못합니다. 근기(根機)가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폐기하지 않고 그대로 둔 규칙이라고 합니다. 불교의 세계관이 참으로 너그럽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갑니다. 싯다르타가 설한 게임 규칙에는 그렇게 이야기한 대목이 없다는 겁니다.
5. 운명의 체스판을 뒤엎을 거야
‘아니, / 나는 삼켜지지 않아.’
새로운 세계관을 생성시키는 것이 낡은 세계관을 극복하는 길입니다. 낡은 세계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낡은 세계관을 새롭게 생성시켜주어야 합니다.
유교의 세계관은 중세의 다양한 세계관들을 받아들여 업그레이드시킵니다. 불교의 세계관의 이사(理事) 개념을 이기(理氣)로 받아들인 것은 탁월한 업그레이드입니다. 유교 자체 내의 세계관 게임에서 결국 기일원론이 이기이원론을 제압해가는 과정은 세계관 게임의 백미입니다.
‘혀를 적실 거야 / 냄새 맡을 거야 / 겹겹이 밤의 소리를 듣고 / 겹겹이 밤의 색채를 읽고 / 당신 귓속에 노래할 거야’
자연인의 죽음의 쓸쓸함을 담담하게 마주할 수 있는 지혜인이 되는 것, 죽음의 두려움을 조장하는 중세인을 넘어서는 것 등은 온몸으로 지혜를 온축해 나가는 학문을 통해 가능한 일입니다. 암흑기라고까지 이야기하는 중세의 ‘검고 긴 그림자’를 거둬내는 일을 서구에서는 ‘계몽주의’라고 했고, 조선에서는 소위 ‘실학’이라고 했습니다. 그 학문의 근본에 저는 0=1=2=∞(多)라는 세계관을 놓고 싶습니다. 계몽주의와 실학이 실용학문, 분과학문이라면, 중세의 세계관 게임과 같은 학문은 철학 또는 학문학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0=1=2=∞(多)에 대해 노래하는 세계관의 학문은 이제부터입니다. 아직도 중세인들의 세계관으로 살아가는 중세인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누가 옳고 그른지 알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세계관들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을 알게 되어도 좋겠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한용운, 님의 침묵, 끝부분.)
'검은 그림자는 검푸른 그림자'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아니, / 나는 삼켜지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