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또는 용서, 그 깊은 내면의 소리
밥통성찰록
謊語 황어
靑蛙 朴秀慶 청와 박수경
深高慾望再傲慢 심고욕망재오만
固腐觀念更偏見 고부관념갱편견
雖聽何言謊語耳 수청가언황어이
無我之中密陽露 무아지중밀양로
거짓말이야
깊고 높은 욕망덩어리 위에 다시 오만덩어리
굳고 썩은 관념덩어리 위에 또 편견덩어리
비록 무슨 소리를 들었다 한들 다 거짓말일 뿐
그놈이 곰삭은 사이로 얼핏 밀양이 번진다.
謊 잠꼬대할 황
(퇴근해서 막둥이와 치킨에 술 한 잔 하면서)
아내와 함께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密陽, Secret Sunshine)>을 다시 보았습니다. 저는 이창동 감독 편(?)입니다. 성찰의 세계로 이끌어주니 편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영화 전체를 곱씹어 보자면 길고 지리한 분석들이 이루어져야 하겠기에, 여기에서는 '용서'라는
주제에 한정해서 생각해 봅니다.
1. 두 개의 용서
영화에 두 개의 용서가 나옵니다.
1) “유괴범을 용서했어요.” 유괴범에게 아이를 잃은 신애(전도연)가 한 말입니다.
2) “하나님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유괴범(조영진)이 감옥에서 한 말입니다
죄인은 한 사람인데 용서는 두 사람(?)이 했습니다. 피해자 가족이 용서하지 않았는데 가해자는 용서를 받고 감옥 안에서 마음 편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부조리라고 합니다.
2. 죄와 벌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벌이란 죄지은 자에게 괴로움을 주는 일을 말합니다. 국가가 죄인을 감옥에 가두는 벌을 주었습니다. 국가가 벌을 주는 일은 일종의 공적인 분풀이입니다. 사적인 분풀이를 대행해 주는 겁니다.
죄는 지었지만 벌을 주지 않는 것, 괴로움을 주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용서라고 합니다. 죄인을 법적으로 용서하는 일, 즉 감옥에 보내지 않는다거나 감옥에서 풀어주는 일 등은 여전히 국가의 소관사입니다.
법적인 절차의 벌이 아니더라도 다른 양태의 벌이 있습니다. 양심의 가책이 그 가운데 하나일 수 있습니다. <밀양>의 경우 양심을 꾸짖는 소리는 누구의 소리일까요?
가) 피해자의 소리입니다. 즉 죽은 아이와 아이 엄마의 고통과 분노의 소리입니다.
나) 가해자 내면의 소리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꾸짖는 자책입니다.
“유괴범을 용서했어요”라는 신애의 말은 유괴범에게 전해지지 않았으니, 유괴범은 가)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유괴범이 “하나님이 용서해 주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유괴범에게 나)가 있기는 했겠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로써 유괴범은 나)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하나님의 용서', 이 주제는 너무 무겁고 너무 많은 문제를 안고 있기에 내려놓습니다. 그 사이 유괴범은 슬그머니 가)로부터도 자유로워졌습니다. 그 슬그머니에 비약과 오류가 있습니다.
3. 용서의 의미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갑) 피해자로 인해 받게 될 죄책감을 가해자가 갖지 않기를 바란다는 의미입니다.
을) 피해자가 스스로 마음속에서 가해자에게 받은 피해로 인한 분노와 증오를 다 삭였다는 의미입니다.
신애가 유괴범을 용서했다고 한 것은 갑)인가요? 을)인가요? 갑)의 용서를 말로 전하는 의식을 치름으로써 을)의 용서에 이르기를 바랐다고 보는 게 좋겠습니다. 즉 깊은 속에는 자기를 위한 용서라는 의미가 있었던 겁니다.
신애는 갑)의 용서는 했지만, 을)의 용서에는 이르지 못하고서 마치 다 용서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셈입니다. 갑)의 진정성마저도 의심되는 겁니다. 결국 “유괴범을 용서했어요”라고 하는 신애의 말은 신애가 틀어놓은 노래처럼 말짱 '거짓말이야'라고 볼 수 있는 겁니다.
가해자가 용서를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A)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한 벌로부터, 즉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의미입니다. 피해자가 갑)의 용서를 하고 을)의 용서에 이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피해자의 괴로움을 덜어줄 수 있는 어떤 일이든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거기에는 피해자가 주는 어떤 벌이거나 모욕도 달게 받겠다는 의미도 포함됩니다.
B) 가해자가 수없이 많은 죄를 짓고 있는 자기 자신의 어리석은 마음을 다 삭였다는 의미입니다.
유괴범은 A)의 용서를 구하려는 마음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B)의 용서를 얻었을 수는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 용서가 그렇게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인지, 그렇게 편안하고 밝고 맑아도 되는 것인지 의문일 수밖에 없습니다.
4. 밀양
가해자나 피해자나 한을 품게 마련입니다. 굳은 한을 삭이면 깊은 그늘이 됩니다. 깊은 그늘을 삭이면 그늘을 뚫고 깊은 내면의 빛, '밀양'이 얼푸시 비치기도 하겠습니다. 저는 그것을 '밝은 그늘'이라고 합니다.
유괴범이 끊임없이 깊어져만 가는 밝은 그늘을 가진 사람으로 거듭난 것인지, 굳은 내면의 소리(관념, 신념, 신앙)로 인해 깊은 내면의 빛을 향하는 일은 멈추고 그 굳은 내면의 소리로써 깊은 내면의 빛, '밀양'을 다 보았다 하는 것은 아닌지 묻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속고 있는 줄 모르는 유괴범의 신념의 소리, '하나님의 음성'이 또한 '거짓말이야'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5. 거짓말이야
겉으로 지어내는 모든 말이 겉짓말(거짓말)입니다. 속에 있는 말을 겉으로 드러낸 거짓말도 있고, 속에 없는 말을 겉으로만 꾸며낸 거짓말도 있습니다.
거짓말너머에 속에 있는 말이 있겠습니다. 그 속에 있는 말 너머에 더 깊은 내면의 소리가 있습니다
신애는 분노와 증오라는 거짓말의 감옥에 갇혀서 삽니다. 그래서 현실이 곧 지옥입니다.
유괴범은 신의 음성이라는 거짓말에 사로잡혀 삽니다. 그래서 감옥이 곧 천국이지만 자기만의 천국일 뿐입니다.
자기 속을 좀 들여다보았다고 그 속에 있는 말에 꽉 붙잡혀 있으면 더 깊은 내면의 소리인 새로운 빛의 영역, '밀양'에는 이를 수 없습니다.
6. 깊은 내면의 소리
깊은 내면의 소리라고 하면, 어떤 이는 영원불변의 진리를 전하는 거룩한 신의 음성을 떠올리기도 할 것입니다.
깊은 내면의 소리는, 온갖 겉짓말(빈말, 지어낸 말, 꾸며낸 말, 관념덩어리)들의 켜켜 너머에 있대서 깊다는 겁니다. 무슨 소리를 들었든 겉짓말입니다. 무엇을 보았든 겉짓입니다. 누군가를 속여서 거짓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내면의 굳은 관념덩어리, 편견덩어리, 오만덩어리, 욕망덩어리에 속고 있기 때문에 거짓이라는 겁니다. 그것들이 내면의 겉, 속에 있는 겉입니다.
깊은 내면의 소리는, 관념덩어리, 편견덩어리, 오만덩어리, 욕망덩어리인 그놈 내면에 있는 겉(거짓)들이 곰삭아서 물러터지는 성숙함에서 나온대서 깊다는 겁니다. 들으려 해서 들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철통 같은 그놈들이 곰삭아야 들리게 되는 것, 보려고 해서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밥통 같은 그놈들이 곰삭아야 보이게 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기에 저는 그 깊은 내면의 소리, '밀양'은 다 보았다 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하여 그 깊은 내면의 소리는 모름다움의 영역으로 놓아두고 그놈을 삭여가자는 겁니다.
겉짓말을 참말, 진리라 우기는 짓을 까부는(껍데기가 우쭐거리는) 짓, 어리석은 짓이라 합니다. 모름지기 자기 자신을 깊이깊이 삭여 가는 앓음다움 속에 알음다움과 알움다움과 안음다움이 피어나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렇게 스스로 용서가 되어있는 사람, 저절로 용서가 되는 사람, 아름다운 사람에게서 '밀양'이 얼핏 번져 나오는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