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어김없이 8시 반 출근, 8시 퇴근이라는 '생업, 삶의 현장'에서 무사히 돌아와, 샤워하고, 퇴근하면서 사온 막걸리에 생두부와 오이를 안주로 하기로 했습니다.
濁酒一杯 탁주일배
- 答任昌丁燒酒一杯 답임창정소주일배
靑蛙 朴秀慶 청와 박수경
白晝喧譁黃昏落 백주훤화황혼락
濁酒一杯單坐傾 탁주일배단좌경
孤單寂寥飮投盞 고단적요음투잔
無所意望不羨仙 무소의망불선선
막걸리 한 잔 - 임창정의 소주 한 잔에 답함
한낮의 시끌시끌함이 땅거미에 내려앉고
막걸리 한 잔 혼자 앉아 기울이노라니
고단함과 쓸쓸함을 술잔에 타서 마시면
바라는 바 없으니 신선도 부러울 게 없네.
2. 둘째 딸의 귀가
대학2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 중인 둘째 딸 소담이가 신촌에서 학교 사람들과 어울리다 들어왔습니다.
나 : 뭐 좀 먹을래?
소담 : 아니 괜찮아요.
그러더니 냉장고에서 지 엄마가 만들어 놓은 요거트를 가져와 제 앞에 앉습니다.
나 : 오늘은 운전대 잡아봤어?
소담 : 아빠, 나 오늘 기능시험 연습 100점 맞았어요.
나 : 아빠는 기능시험에서 두 번이나 떨어지고 세 번째에나 붙었는데.
소담 : 아빠, 근데 오이 냄새가 확 올라와요.
3. 오이로부터 시작된 즐거운 비약
나 : 오이 혐오증이 있어 오이를 못 먹는 사람에게 최면을 걸어 오이 혐오증을 없애고 오이를 먹게 했다는 실험이 있었는데, 니 엄마가 좋아했던 피디가 쓴 <마음>이라는 책에 그 내용이 나오는데. 여보~ 그 피디가 최영돈이었나?
아내 : 이영돈~.
나 : 뇌에 저장된 정보 시스템에 의해 행동이 이루어지는데, 저장된 정보 시스템을 최면 같은 것을 통해 바꾸어 주면 다른 행동 패턴이 생기게 된다는 거지.
소담 : 아빠, 그러면 본능적인 것도 바꾸는 것이 가능하겠네요?
나 : <토탈리콜>이라는 영화가 있었어. 사람의 뇌 속에 기억을 이식시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낸다는 영화였지.
여기서 <토탈리콜>이 왜 튀어나왔을까요? '본능적인 것을 바꾼다'는 말에서 나왔겠습니다. 아내는 알콜성 치매의 전조증상이라고 그럽니다. 어쨌든.
나 : 영화는 영화고, 나는 병리적인 몸의 상태를 치료하는 거지, 본능적인 부분까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봐.
소담 : 내가 배가 고플 때 음식을 보면 호르몬이 분비되고, 무언가를 먹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는 거는 본능이잖아요?
나 : 그렇지, 식욕.
소담 : 그럼 자기 최면 같은 것으로 식욕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나 : 일시적으로야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 거식증 같은 병리적인 상태가 아니라 생리적인 본능의 문제라면, 식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경지에 부처님은 이르렀을까? 부처님이 그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들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 이르러야 할까?
소담 : 오이 하나가...^^
나 : 그러게 오이 하나에서 부처님까지, 너무 갔네? ㅎㅎ
4. 전철 안에서
대학 1학년, 제가 지금 소담이 나이만 한 시절, 학교에 가려면 전철을 타고 1시간 넘게 가야 했습니다. 반쯤은 졸음에 취해 반쯤은 술이 덜 깨서, 손잡이 붙잡고 선 채로 흔들거리며 몽상에 빠져들었습니다.
이름은 '한결'이로 지었습니다. 몽상 속의 제 아이 이름이었습니다. 웬걸, 지금 셋째 딸 이름이 한결입니다. 저는 그 한 시간 동안 한결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때 난 참 별난, 한결이 아빠였습니다.
5. 지금은
대화 내용에 잘못된 정보가 있다거나, 논리적 오류가 있다거나, 기억을 재생하는 데 잘못된 부분이 있다거나 하는 건 지금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1983년 전철 안에서 꾸었던 몽상 속의 삶을 2023년 지금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지금도 저는 여전히 별난, 예쁜 세 딸의 아빠입니다.
6. 기억과 행동
<토탈리콜>이 나온 김에 한 장면을 가지고 와 보겠습니다.
퀘이드(아널드 슈워제네거) : 기억이 돌아와 나 자신을 찾고 싶다.
쿠아토(마샬 벨) : 당신은 이미 '당신'이다. 사람은 기억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당신을 정의하는 것이다.
퀘이드라는 인물, 하우저라는 인물, 하우저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은 퀘이드라는 인물, 하우저도 퀘이드도 아닌 '나'라는 인물, 어느 인물이 가상 인물이고 어느 인물이 현실 인물인가 라는 논쟁을 낳은, 영화의 고전입니다.
기억은 과거이고, 행동은 현재입니다. 행동은 기억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기억들이 전혀 달라진다면 전혀 다른 패턴으로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뇌 속의 기억을 이식하고 수정하는 것이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기억, 중요합니다. 자기의 과거 기억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 기억들 속에 들어있는 자기의 행동양식입니다. 자기의 행동양식은 자기가 세계에 대해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가라는 자기 느낌의 반응체계를 말합니다. 저는 그것을 자기의 '영혼(얼, 넋)'이라고 합니다. 체험을 통해 기억들이 쌓이고, 기억 속에 묻어 있는 느낌이 내면화되어 느낌의 반응체계인 자기 영혼을 이루어 가는것입니다.
어젯밤, 또 하나의 아름다운 체험이 제 안에 쌓였습니다. 딸아이가 제 영혼을 각성시켜 조금 더 부드럽고, 따스한 느낌으로 세상을 대했으면 좋겠다고 저를 안아준 느낌으로 기억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