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이 하늘 소풍 끝내는 날, 제1부 하늘
밥통성찰록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제1부
귀천(歸天)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我將歸于天 아장귀우천
朝露霞光遊 조로하광유
當世逍風畢 당세소풍필
去說美麗兮 거설미려혜
(박수경 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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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아버님을 보내드리며 되뇌어 본 시가 천상병 시인의 <귀천>입니다. 친구 아버님만이 아니라, 친구도 가고 저 또한 돌아가겠지요.. 2022년에 저도 아버지를 제 마음에 모셨습니다. 천상병 님의 시 <귀천>을 통해 마음에 모신 분들을 다시 뵙고자 합니다.
<귀천>의 핵심어는 소풍인데, 하늘과 아름다움을 알아야 소풍을 제대로 끝낼 수 있겠습니다. 이 번 글은 2부로 나누어 씁니다. 이번 1부에서는 하늘을, 다음 2부에서는 아름다움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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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하늘로 돌아가리라' 했으니, 하늘에서 왔다는 말이겠는데, 온 하늘도 모르겠고 돌아갈 하늘도 모르겠습니다. 윤동주 님의 시 한 구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윤동주, <자화상>에서
윤동주 님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그의 섬세한 심미안에 가슴이 멜 뿐만 아니라, 탁월한 혜안에 탄복하게 됩니다. 우물 속에 하늘이 펼치고 사나이가 있다고 했습니다. 신동엽 님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라고 했습니다. 우러러보던 하늘을 들여다보아야 하게 생겼습니다.
2.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남자는 배도 아니고 남자는 하늘이랍니다. 근거가 뭐지요?
옛사람들은, 하늘은 높고 거룩하며, 땅은 낮고 비천하다고 했습니다. 이른바 천존지비의 세계관입니다. 여기서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남존여비가 나왔습니다.
천존지비를 리기(理氣)로 바꿔 보겠습니다. 하늘은 리고 땅은 기라는 건데, 리와 기가 각각 실재하고 리가 우선한다는 이원론적 주리론입니다. 여기서의 리는 도덕적 당위 또는 초월적 진리를 말합니다.
그런데 윤동주는, 땅을 파고 만든 우물 속에 하늘이 펼쳐졌다고 했습니다. 하늘이 땅으로부터 저 높은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물 속에 펼쳐져 있습니다. 이 하늘은 무엇일까요? 하늘이 땅 속에 내재되어 있는 그 무엇입니다. 리기로 말하면, 리는 기에 내재되어 있는 그 무엇일 뿐이라는 겁니다. 기일원론입니다.
윤동주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세계관은 일원론으로 귀결됩니다.
이원론적 주리론과 기일원론 가운데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잘못되었는지 저는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세계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3. 제가 본 하늘
제가 본 하늘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돌이켜 보는 것, 그것이 우물을 파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들, 원리들이 보일 겁니다.
그 살아가는 방식, 원리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면, 우리가 사물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작용하는가 하는 행동체계입니다. 하늘이란 결국 행동체계를 이루고 있는 방식이고 원리일 따름입니다.
아직 이것이 하늘처럼 느껴지지 않겠지요. 하늘은 상식적 높이와 심리적 거룩함을 가져야 한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느낌을 가직고 있는 말로 바꾸어 보면, 하늘은 우리의 복잡한 행동체계의 심층에 존재하는 '어떤' 경향성을 가진 심층구조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영혼(얼, 넋, 신명, 신, 신바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그 영혼의 빛깔과 향기, 즉 경향성이 다릅니다. 누구나 이런 첫 번째 하늘에서 살고 있지 않겠는가 추측을 해봅니다. 조금 더 추측을 밀고 나가 보자면, 세상천지 만물이 활동운화하는 이치를 하늘이라 불러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번째 하늘이 깨어난 날이 있었습니다. '그님'이 깨어난 겁니다. <쉽게 씌어진 시>에서 윤동주가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라고 했던 순간이 제게도 있었던 겁니다. 그놈과 그님의 동행, 그것이 저의 두 번째 하늘의 모습입니다. 밥통 같은 그놈과 성찰하는 그님의 조화와 갈등이 두 번째 하늘의 풍경입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살고 있는 땅(세상, 지상)의 하늘입니다. 그 세계를 천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 하늘 아래에서 살고 있는 겁니다.
4. 누가 본 하늘
그런데 누군가 또 제게 그럽니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세 번째 하늘, 천상의 이치가 있다는 겁니다. 경험적 세계인 지상과 초경험적 세계인 천상, 이원론적 세계관입니다. 지상의 세계에 기반하고 있는데, 그것을 넘어선 세계, 신화적 상상력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세 번째 하늘입니다. 그것이 천존지비의 하늘입니다.
어떤 이는 그 세 번째 하늘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하늘나라, 천국을 보았다고, 그래서 하늘나라와 천국, 하느님에 대해서 안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그 세 번째 하늘에서 산다고 합니다. 생로병사, 탐진치, 애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그런 세상, 깨달음 이후의 세상, 해탈의 세계에서 산다고 합니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세 번째 하늘은 제게 그런지 아닌지 확증할 수 없는 모름다움의 영역입니다. 저는 생로병사, 탐진치, 애증을 안고 사는 그놈을, 그님이 품고 동행하는 밥통성찰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두 번째 하늘에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세 번째 하늘에서 살아가는 일은 상상으로든, 현실적으로든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두 가지 정도만 짚어 보겠습니다.
첫째, 실상은 첫 번째나 두 번째 하늘에서 살아가면서 세 번째 하늘에서 살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는 겁니다. 스스로 속고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고매하고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고 스스로 그렇게 여기고 있다면, 어쩌면 그 순간이 바로 밥통성찰이 필요한 순간일 수 있다는 겁니다. 기독교에서는 그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둘째, 어떤 것이 가능하다고 해서 누구나 꼭 반드시 그것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다 산꼭대기까지 올라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산꼭대기에 오르는 것은 절실한 자기 선택일 뿐입니다. 불가에서는 그것을 초발심이라고 합니다.
자기 삶의 절실한 선택의 순간에 밥통성찰이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누리게 되는 복을 행복이라 한다면, 우리가 죽어서 누리게 되는 복을 명복(冥福)이라 합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고인의 명복이란 없습니다. 고인의 죽음 뒤에 살아있는 자에게 여겨지는 고인에 대한 감회가 있을 뿐입니다. 고인의 삶이 어떻게 기억되고, 추억되고, 기념되는가 하는 것이 고인의 명복인 셈입니다.
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산 자들에게도 복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복이라 여기면 복 아닌 것이 없고, 복이라 여기지 못하면 남들이 복이라 여기는 것도 제게는 복일 리 없습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살아가는 일이 이미 서로의 하늘을 모시는 겁니다. 이 세상 소풍 끝내고 돌아갈 하늘은 이 세상천지의 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