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이 하늘 소풍 끝내는 날, 제2부 아름다움
밥통성찰록 - 아내의 손글씨입니다.
<귀천>의 핵심어는 소풍인데, 하늘과 아름다움을 알아야 소풍을 제대로 끝낼 수 있겠습니다. 지난 번 1부에서는 '하늘'을, 지금 2부에서는 '아름다움'을 다룹니다.
1. 아직도 인생이 아름답냐?
眞生美乎 진생미호
憎而再三抱厥者 증이재삼포궐자
須開理關採根本 수개리관채근본
心之睡種創發現 심지수종창발현
隨痛成熟深美哉 수통성숙심미재
미워도 다시 한 번 그놈을 안아주고
모름지기 이치의 관문을 열어가다 보면
내 안에 잠든 알이 움터서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것이 아름다움이려니.
영호 : 아직도 인생이 아름답냐? 마지막으로 하나 더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남자 : 예?
영호 : 네 노트에...... ‘삶은 아름답다’라고 쓰여 있던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 삶은 아름다워?
영화 <박하사탕>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다 잡혀 온 남자와 그를 고문하는 형사 김영호(설경구 분)가 나눈 대화입니다. 삶이란 결국 함(짓, 행위와 반응)입니다. 그게 뭐든 어떤 짓을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제가 한 짓이 아름다운 짓인지, 우리가 하는 짓들이 아름다운 짓들인지, 그 아름다움이라는 게 뭐냐는 거지요.
이창동 감독의 그 물음을 참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지내왔습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라는 물음으로 바꿔서 오래된 물음에 대해 답을 해봅니다. 저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지니고들 삽니다. 제가 지니고 사는 아름다움은 이렇습니다.
2. 아름다움이란 알음다움입니다.
세상을 품고 이치의 근본을 살펴서 자기내면을 곰삭히는 것이 알음다움입니다. 이치의 근본을 깨달았다 해도 더 깊은 근본 이치를 열어두는 것이 모름지기입니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모르겠다 말하는 것이 모름지기입니다.
세상 진리를 깨달았다 하는 사람 치고 그 깨달음을 자기 삶에 적용하지 못하는, 깊이 내면화 시키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모름지기란 이정표와 같은 것입니다.
<여기부터는 더 깊은 앎으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라는 표지입니다. 성숙한 알음다움을 모름다움이라 합니다.
3. 아름다움은 안음다움입니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이 '안음다움'입니다. 미움이란 상대를 마음 밖으로 '밀어내는 마음가짐'입니다. 상대가 뭔 짓을 하든지 그 상대를 밀어내지 않고 안아주고 품어주는 마음가짐이 '안음다움'입니다. 그 안음다움이 아름다움이고, 아름다움의 반대는 미움입니다.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제 뜻대로 되는 일도 있고 제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제 뜻에 맞는 일도 있고 제 뜻에 어그러지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 세상 한껏 품을 수 있는 만큼 안을 수 있는 안음다움, 그 무한한 포용성인 열림이 아름다움입니다.
4. 아름다움이란 알움다움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무한한 가능성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이란 우리 삶이 미리 정해진 판에 박힌 어떤 것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발현해가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 무한한 가능성인 알을 창조적으로 발현시키는 것을 알움다움이라 합니다.
알음다움으로 제 안에 있는 무한한 가능성인 알(씨알, 씨앗)을 움트게 하고, 안음다움으로 세상을 제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알움다움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인 자기자신을 나름대로 이루어 가는 알움다움이 아름다움입니다.
5. 아름다움이란 앓음다움입니다.
윤동주가 <서시>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고 노래한 것이 중생한(衆生恨)입니다. 죽어가는 모든 것들의 고통을 가여워하는 느낌입니다. 그 섬세한 감수성이 ‘앓음다움’입니다. 깊은 공감능력인 섬세한 감수성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러려면 단단한 자기껍질, 자기한계, 자기모순, 자기버릇을 마주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씨알이 움트기 위해 자기껍질을 깨고 나오는 아픔을 견뎌내는 앓음다움이 아름다움입니다.
6. 아름다움이란 알흠다움입니다.
우리가 대상을 볼 때는 먼저 육안으로 봅니다. 거기에 겉이라는 외모, 외형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육안으로만 보고, 겉이라는 외모, 외형만을 보는 것일까요? 그러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거기서부터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느낌을 받게 되기도 합니다. 겉이 겉만이 아니기 때문이고, 보는 눈이 육안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겪어보면 알게 되는 깊은 속, 복잡한 속이 있기 때문이고, 육안 너머 심미안이라는 정서적인 눈이 있고 혜안이라는 지혜의 눈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신체에 있어, 어쩌면 가장 진화된 것이 육안일 수 있습니다만, 그렇기에 오히려 그것에 속을 수 있는 확률이 더 커졌습니다. 본 것이 다가 아니라고 하면서 무조건 믿으라고 할 것은 아닙니다. 심미안과 혜안으로 육안의 결함을 보충해 가면서, 겉 모습의 알흠다움을 다른 내면의 아름다움들인 알음다움, 안음다움, 앓음다움, 알움다움과 함께 참다운 아름다움으로 피워나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나 생각해 봅니다.
알흠다움을 겉모습의 아름다움이라 했지만, 그 겉모습 속에, 알흠다움 속에 내면의 아름다움(알움다움, 알음다움, 안음다움, 앓음다움)이 들어있는 겁니다.
7. 그래서 지금 얼마나 아름다운지
예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을 때, 발해 건국 1,300년을 기념하기 위해 발해 사람들이 했듯이 한 겨울에 뗏목으로 항해를 하겠다는 사람들과 교분을 가졌습니다. 그 가운데 "아름답잖아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임현규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한국에 돌아가셔서도 지금처럼 학생들에게 아름답게 사는 것을 가르쳐 주세요."
그 청년이 저와 팔뚝을 마주잡고 제게 힘주어 당부한 마지막 말입니다. 뗏목 탐험대 4인은 모두 동해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금 여기, 저는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는지 돌이켜봅니다.
인생은 무수히 다양한 아름다움으로 피어날 수 있습니다. 자기 인생을 품고 세상살이의 이치를 살펴 자기 삶에 적용해 가다 보면, 아름다운 사람으로 거듭나 있는 자기 자신과 만나게 되는 아름다운 일도 있을 테지요.
(註1) '앓음다움'이라는 말은 제 친구 고길섶 군이 제 글을 읽고 제안한 용어입니다. 그 친구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 임자가 따로 있기 마련인가 봅니다.
(註2) '알흠다움'이라는 말은 김희상 선배님, 윤명숙 선배님 두 분과의 소통의 과정에서 알게 된 표현인데, 지금 이 글에서 그 말(시니피앙, 표상, 기표)에 '겉모습의 아름다움'이라는 의미(시니피에, 표의, 기의)를 제 임의로 부여해 정의해서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