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나 Nov 28. 2020

엄마의 자리, 아이의 자리

결혼한 지 5년, 아이를 낳고 2년이 되어가도록 엄마가 우리 집에 온 것은 단 세 번 뿐이었다.

신혼살림을 차린 직후 한 번, 아이를 낳은 뒤 삼칠일에 한 번, 아이 백일에 한 번.


그런데 내 주변엔 왜그리 사랑이 넘치는 집의 딸들이 많은 건지,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다 먹지도 못할만큼 많은 반찬을 쟁여주고 육아에 대한 잔소리를 늘어놓는 친정엄마에 대한 자랑섞인 푸념을 들을 때 마다 내 눈빛은 과도한 부러움으로 흔들렸다.


그래도 이해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엄마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면 머리로 이해하려 했다.


엄마도 피곤하겠지.

이제 엄마 노릇 하기 지겨울 때도 되었지.

난 혼자서도 잘 할 수 있으니깐 괜찮아.  


"내가 거기 가서 뭐해~"


이사한 새 집으로의 집들이 초대를 단칼에 거절하는 엄마의 대답을 듣는 순간 내 마음속에 얇지만 팽팽하게 연결되어 있던 줄이 탱!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마 그 줄은 30여년 간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었을 것이다. 전화를 끊은 후 한참을 울다가 엄마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지 못했었던, 내 속에서 시꺼멓게 썩어버린 말들을 고스란히 내었다.


이혼한 뒤에 안 버리고 키워준 엄마가 대단하다고 엄마한테 잘해드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서, 그리고 엄마가 항상 위태위태해 보여서 내뱉지 못했었는데


사실은 내가 아주 어릴 적 부터
모든 끔찍한 순간들을 다 기억하고 있다고.
당신들의 불화와 이혼으로 당신들만 힘들었던 것이 아니라
나도 마음의 병을 얻어 오래 앓았다고.


엄마는 늘 유난스럽고 예민한 나를 키우는 것이 얼마나 고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나는 단 한번도 이야기 한 적이 없었다. 평범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라는 것이 예민한 나에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늘 우울하고 피곤한 엄마를 보며 사는 것이 얼마나 지치는 일이었는지.




중학교에 입학할 당시 모든 신입생이 심리검사 같은 것을 치뤘다. 자살을 각해본 적 있냐는 항목에 '그렇다'를 선택했는데 선생님으로부터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나중에 엄마가 아빠한테 하는 말을 들어보니 그 항목에 '그렇다'라는 답을 선택한 사람이 두 명 뿐이라고 했다. 난 사실 그 사실에 놀랐다. '어떻게 다들 한 번도 죽고 싶었던 적이 없을 수 있지?'


그런데 누구도 나에게 '왜 자살을 생각했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듯 했다. 입학한 후에도 난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업시간 중에 책상서랍에 손을 넣고 조각칼로 손목을 그으려고 했는데 그을 용기가 안 나서, 그게 비참해서 수업시간에 바보처럼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시간이 지나 부모가 이혼하기 직전 몇 달 동안 나는 베개 아래에 항상 가위나 칼을 두고 잠들었다. 술에 취한 아빠가 혹시나 나머지 식구들과 나를 공격하면 내가 막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돌이켜 보면 아빠가 그만큼 악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부모의 싸움 한 가운데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그래도 꽤 큰 내가 느낀 공포감이 그 정도였다.


이혼 후 엄마와 살게 되었을 때는 엄마가 화장실에서 조금 오래 있는다 싶으면 걱정이 되어 일부러 불러보곤 했다. 엄마가 목을 매다는 모습이 자꾸 상상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부모가 내 눈앞에서 보여주었던 극단의 감정들은 나로 하여금 무엇이든 극단을 상상하게 했다.


나도 상처를 입은 상태였고 서툴렀지만 엄마를 걱정하며 보호려 했는데 엄마는 달랐다.


초등학교 때 아파트 계단에서 남자 고등학생에게 몹쓸짓을 당해 응급실에서 진료를 받을 때에도

중학교때 정수기에서 물을 받다가 온수에 화상을 입어 병원에 데려가 달라고 했던 때에도

수능을 치른 뒤 혼자 내과에 가서 갑상선 검사를 받고 암일 수도 있다는 소견을 받은 뒤 울며 말했을 때에도

대학생 때 갑자기 물에 빠진 것 처럼 숨을 쉴 수가 없어 두려움에 떨며 엄마 방으로 갔을 때에도,


엄마는 항상 화를 내고 짜증을 냈다. 나에게 항상 너는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상황에 맞지 않는 질문인데, 그 당시에는 그런 비난섞인 질문을 받을만큼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짐작은 된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오는 분노, 아이가 다치거나 아플 때 느끼는 죄책감, 인생에 대한 피로감, 기본적인 우울감 같은 것들 때문이었으리라. 엄마에게 안기고 싶은 순간 거절당하는 슬픈 마음을 이겨내기 위해 항상 머리로 엄마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혼란스러웠다. 엄마는 분명 우리를 최선을 다해 키워주었다. 그런데 나는 왜 엄마가 밉고 엄마의 존재에 항상 목마른걸까?


나와 동생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할 때 사람들은 항상 엄마를 보며 대단하다고 추켜세웠고 항상 그 끝엔 이 말이 있었다. "엄마한테 잘 해드려. 너희 이렇게 잘 키우느라 여자 혼자 너무 고생이 많았다."


엄마는 실제로 고생을 많이 했다. 이혼 직후 살 곳이 없어 둘째 이모 집 다락방에 얹혀 살며 동생 집 식모 일을 해야했고, 운 좋게 식당의 사장님이 되었지만 그 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외할아버지의 장례식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하루도 쉬지 못했다.


초등학교 때 내 적성을 찾아주기 위해 빚을 내고 아빠와 싸워가면서까지 피아노, 바이올린, 성악 개인레슨을 시켜주었던 기억이 난다. 화실도 보내주었다. 그 시절 교육열 높은 엄마들이 하는 것들은 다 시켜주었고, 심지어 나는 대학생 때 1년간 어학연수도 떠났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우리 집의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가정사를 짐작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았다.


그 때문에 나는 엄마에게 어떤 것 하나 원망하지 못했고, 나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지도 못했다. 엄마의 희생이 나에 대한 사랑이라고 배웠으니깐. 그렇게 치면 나는 어마어마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니깐.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엄마는 나와 내 동생을 일컬어 '펀드'라고 했다. 우리가 잘돼서 효도할 것을 기대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한다고 했다.


어학연수를 다녀온 지 2주 정도 지났을 때 내 책상위에 편지가 하나 놓여져 있었다. 어학연수에 지출한 비용을 정리해 놓은 장부였다. 엄마가 그 장부를 통해 나에게 주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엄마에 대한 존경심? 아니면 죄책감?


얼마 전 학창시절 졸업앨범을 정리하다 그 사이에서 상장 하나를 발견했다. 학예회 준비에 보여주신 성의와 열정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표창한다는 학부모 표창장이었다. 구역질이 났다. 그 날 마침 재활용하는 날이어서 종이 쓰레기와 함께 버렸다.


그런 것들이 엄마가 항상 말해온 '노력'이었다. '내가 너희를 어떻게 키웠는데'의 '어떻게'였다.

사람들이 말하는 '부모의 희생'이었다.




나의 부모는 그렇게 쓸데없이 삶을 희생해가며 나의 껍데기를 키워냈다. 내 알맹이는 젖은 흙에 묻혀 싹조차 틔지 않은 채 성인의 껍데기만 뒤집어 쓰고 있었다.


나의 알맹이, 내 '자아'를 키워준 것은 우습게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그것도 저 멀리 프랑스 시골 마을에서 만난 미국인 선교사 부부와 그 교회를 다니던 그 시골마을 주민들이었다. 그들이 나의 '자아'에 준 것은 '존중, 관심, 사랑'이었다.


그들은 늘 나에게 물었다. "평일에 학교 끝나면 뭘하고 지내니?", "한국에서 요새 이슈는 뭐니?", "식재료 구하는데 어려움은 없니?", "너의 계획은 무엇이니?" 그리고 들어주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흘리면 등을 조용히 쓸어주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가장 좋은 것: '성경말씀'을 통해 늘 내가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인지 설득하려 애썼다. 산으로 호수로 떠나는 피크닉에 늘 나를 초대했다. 가서 별거 아닌 빵조가리와 치즈 한 조각을 먹고 호수에 앉아 수다를 떠는 게 다였지만 그게 참 좋았다.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이빨을 보이고 웃는 법을 배웠고 내가 짐짝같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도 되고 행복해도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우습게도 나는 한국으로 돌아온 후 인생의 위기를 맞았을 때, 엄마에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교사 부부에게 날아갔다. 캐나다 퀘벡으로 이주한 그들을 찾아가 관광은 하나도 하지 않고 마치 고향에 돌아간 사람처럼 1주일 동안 그 집에서 먹고 자고 이야기 나누며 마음을 회복했다.


나와 친부모 사이엔 끊으면 천벌을 받는다는 천륜이 있다면 나와 그 선교사 부부 사이에는 관계, 추억, 믿음 같은 것이 있다. 친부모가 나를 위해 '희생'했다면 그 선교사 부부는 나를 위해 '사랑'을 주었다.


나는 그들을 French Mum and Dad 라고 부른다. 나에게 필요했던 부모의 역할은 그런 정서적인 역할들이었나보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그들을 나의 영적인 부모로 여기고 친부모와의 추억보다 더 많은 좋은 추억들을 나누었다 한들, 천륜만큼의 무게는 가지지 못하는 것 같다.


그렇게 살이 떨릴 정도의 분노를 느끼며 연락을 끊은 지 1년이 지나도록 엄마가 고픈 걸 보면 말이다.


엄마가 해주는 밥, 육아에의 도움 이런 것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냥 그런 엄마라도 엄마라고 있어줬으면 좋겠다.

자식은 그렇게 부모에게 상처를 받고 자라 나이를 먹을만치 먹어도 엄마가 필요한 불쌍한 존재인가 싶어, 나는 내 아이에게 평생 엄마노릇을 해주려 한다.


나는 아이에게 희생을 할 생각이 없다. 그저 엄마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일: '아이가 제대로 된 어른이 되어 독립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할 것이고 그것에 대 어떠한 보답도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아이를 너무 사랑하는 나 자신을 위해 아이와의 시간을 추억이 될 만한 것들로 가득 채우고 아이와의 관계를 공들여 쌓아나갈 것이다.


난 언제나 아이에게 엄마의 자리에서 어른답게 굴 것이다.

그래야 아이는 늘 나에게 아이답게 응석을 부릴 수 있을테니.




세상의 달콤하고 뻔한 위로의 말들에 젖어있지 말라.


부모의 이혼이 아이의 흠이 아니라는 말은 그저 별 관계없는 타인이 당신에게 쉽게 베풀 수 있는 동정의 말이지 진리가 아니다. 부모의 이혼은 아이의 삶에 엄청난 흠이고 결핍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이혼하는 과정에서 부모의 다툼 속에서 아이가 겪게 되는 공포감은 내가 말했듯 베개 밑에 가위와 칼을 숨겨야 할 정도의 것이다.


뭐로든 부족한 부모여서 미안하다고 아이앞에서 슬퍼하는 척 말라. 그저 감당할 수 없는 당신의 죄책감을 아이에게 떠넘기는 행위에 불과하다.


아이 앞에서 응석을 부리고 싶다면 그 전에 아이를 제대로 된 어른으로 키워라. 그런데 보통 아이 앞에서 응석 부리는 부모들이 아이를 제대로 키워놨을 리가 없다.


부족한 부모들을 향한 세상의 달콤한 위로가 너무 과하다.

그 부모 밑에서 불쌍하게 자라는 자식들은 아무 위로도 받지 못한 채 그저 숨만 붙어 살고 있을 걸 생각하니 너무 화가 난다.

이전 04화 나는 김연아가 아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