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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나 May 28. 2020

나는 김연아가 아니다.

아이 때문에 일을 포기했다고 말하지 말자.

2년간 겪어보니 '육아'라는 건 아직 혼자의 몫을 해내지 못하는 아이가 성장할 때 까지  시간과 에너지를 나눠주는 였다


공부를 하는 시간이 늘어날 수록 아이에게 나눠주는 내 시간은 줄어들었다. 육아의 시간은 동일했지만 아이가 자는 동안의 시간이 나를 위해 쓰이면서 아이에게 해주는 음식의 질이 낮아졌고 아이와 낮동안 어떤 활동을 할 지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아이의 잠스케줄이 어그러져 공부 시간이 침해되면 짜증이 솟구쳤고 잠들지 않는 아이를 바라보는 내 눈빛은 사랑의 눈빛이 아니었다. 내 공부를 위해 남편은 퇴근하자마자 아이를 보고,  아이가 잠들면 밀린 설거지를 하고 집을 정리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없이 항상 자정을 넘겨 잠들기 바빴다. 아침부터 자정까지 회사와 집에서 이중으로 치이는 남편을 보자니 안쓰럽고 미안했다. 


원하는대로 공부를 하고 나를 위해 시간을 쓰면서 내 마음은 불만으로 가득차버렸다. 행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공부를 하지 않고 하루종일 아이의 반찬을 정성들여 만들었을 때, 저녁에 남편이 돌아올 시간에 맞추어 저녁상을 차리고 맛있게 먹는 남편의 모습을 볼 때, 밤에 아이가 잠들면 내일은 뭐하고 놀아줄 지 고민하고, 아이의 월령에 맞는 책을 찾고, 육아서를 뒤적거리며 육아에 대해 공부할 때, 마음이 더 행복했다. 


한참을 고민하다 남편에게 말했다.

"나 지금 애 키우고 살림 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


잠을 줄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학창시절부터 시간이 부족할 때 가장 먼저 줄였던 것은 식사와 수면시간 이었으니깐. 하지만 육아는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의 기억은 잠깐 졸다가 오타가 나면 백스페이스로 지울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피곤이 무관심이나 짜증으로 변해 나오는 순간 아이의 눈에는 두려움, 의아함, 슬픔 같은 것들이 서렸다. 아이는 부모의 감정을 고스란히 먹고 자라 그 감정을 열매로 맺는듯 했다. 게다가 내가 피곤해 하는 단 며칠이 아이에게는 고작 몇 백일밖에 되지않는 생애 중 며칠 씩이나 되었다. 그 사실들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 그래서, 


죄책감 때문에 모든 걸 내려놓고 전업주부를 하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그것은 죄책감 보다는 오로지 부모의 의사와 행위로 인해 세상에 태어난 아이에 대한 책임감에 가깝다.


일하기 싫어서 집에서 애 보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No. 가끔씩 일하던 시절 외장하드 속 파일들을 열어보며 마음이 동할 정도로 일하는 것을 좋아하고 열정도 많은 사람이다.


그런데 능력이 없어 애나 키우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건 Yes.


원래는 퇴사를 하며 학업을 계획했었고, 아이를 낳은 뒤 그 계획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닥쳐보니 학업과 육아를 병행할 자신이 없었다. 일을 할 때 내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앞선 글에 말했듯이 나는 좋게좋게도 안 되고 러프하게도 안 되는 사람이었다. 성과품이 납득가능한 수준이 될 때까지 일을 쥐고 있는 스타일이었다. 학업이라고 다를까? 또 이런 내가 육아는 대충할 수 있을까? 난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라 순수하게 시간과 에너지로 승부를 봐야 하는 사람인데 육아와 학업을 다 잘해낼 만큼의 정신력과 에너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나도 안다.


많은 엄마들이 돌쟁이 아이를 키우면서 일 또는 학업을 병행하고 그것도 모자라 블로그까지 한다. SNS 속 그들의 완벽해 보이는 삶이 전부 진실인 지 알 순 없지만 어쨌든, 그들의 에너지와 능력은 대단하다. 마치 육아계의 김연아 같은 존재들이다. 모두가 김연아 같이 할 수 있다면 김연아가 대단하다고 평가받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김연아가 아니다. 


능력이 없다고 말하기엔 좀 잘 구석도 있긴한데 일과 육아 모두 쟁취하기엔 부족한 사람이다. 엄마들이 아이 때문에 내 삶을 또는 내 일을 포기했다고 말하기 전에 좀 더 자신에게 솔직해져보기를 권한다.


당신도 아이의 감정을 외면할 수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당신도 일하거나 공부하는 것을 즐기고 성취의 즐거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아이를 낳고나니 가족의 행복과 안정이 내 일신의 영달보다 우선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당신도 이제는 깨달아야 할 지도 모른다.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태껏 노력에게 배신당한 적도 없지만,  양 손에 일과 육아 다 쥐기에는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이 때문에 포기한 것이 아니라
둘 다는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당신의 마음이 아이를 선택한 것임을.

 



내가 요한복음과 이사야서 다음으로 마음에 새기고 항상 떠올리는 글귀가 있다. 법륜스님이 쓰신 <행복>의 한 구절이다.

우리는 모두 풀 같고 개미 같은 존재입니다. 미미하지만 사실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이것을 탁 깨달아버리면 남이 나를 어떻게 보든 신경 안 쓰고 편안히 살 수 있으며, 남의 인생에도 간섭하지 않게 됩니다.


어느땐가, 지금은 더 이상 친구가 아닌 어떤 이에게 이 구절을 말해준 적이 있다. 자신의 친구는 책도 쓰고 강연도 하고 센터도 차리고 잘 나가는데 자기는 이제야 대학원에 들어갔고 공부도 하기 싫고 언제 그렇게 될 수 있을 지 모르겠다며 술을 들이키던 그녀에게 말이다.


내 말을 들은 그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누가 그걸 몰라?"


당신 모른다. 미미하지만 모두 소중하다는 말을 정말 이해했다고 하지만 당신은 미미한 것도 소중하다는 보편적인 메시지만 받아들이고 있다. 당신도 나도 미미하다. 나는 그리고 어쩌면 당신도 일과 육아를 동시에 해낼 수 없는 미미한 사람에 불과하다. 그것을 먼저 받아들여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 그래도 소중하다는 이야기는 미미함을 겸허히 수용한 뒤의 이야기이다.





표지 사진 출처: koreanbea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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