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나 Jul 25. 2020

육아 친구 꼭 필요할까?

안 만들어도 괜찮아요

못 하는 아기와 지내며 혼자 말하고 혼자 웃는 낮 시간이 영 헛헛하게 느껴지고 익숙치 않았던 시절, 동네 친구를 구했었다.


주변의 말을 들어보면 조리원 동기나 동네 친구는 엄마의 정신건강을 위해, 아이의 친구를 만들어주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처럼 보였다. 뭔가 아기와 나 단 둘이서만 생활하면 이 세상에서 왕따가 되거나 뒤쳐질 것처럼 느껴졌달까? 밥도 각자 방에서 먹는 개인주의적인 조리원을 선택했던 지라 조리원 동기도 없었던 나는 지역 맘 카페에 동네 친구를 구한다는 글을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또래에 아이들 월령도 비슷한 친구들이 여럿 구해졌다.


결론적으로는 모두 오래 가질 못했다.


모두 처음에는 마치 몇 년을 알고 지낸 사이처럼 급격히 가까워졌다. 할 얘기는 또 얼마나 많은가? 스펙터클한 출산, 생전 처음 접해보는 육아, 그리고 서로 모르고 지냈던 과거가 다 이야깃거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야깃거리가 점차 떨어지면서 일상들이 오고 가고 서로 눈치채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 육아를 막 시작했다는 점만 같을 뿐 공유하는 성향이나 가치관이 단 하나도 없구나."


학창 시절처럼 많은 친구 후보 pool에서 충분한 탐색 후 한 두 명을 사귀는 것이 아니라 동네 한 복판에서 엄지를 치켜들고 '애 있고 심심한 사람 여기여기 붙어라'해서 만난 사람들이 나와 비슷할 확률은 0%에 가까웠다. 딱 몇 가지 조건만 같을 뿐이다.


--------- 나이가 비슷하고,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았고, 적적한 사람.


사실 성향이나 가치관이 다르다고 해서 친구가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성인이 되어 사귄 친구들 같은 경우는 성향이나 가치관이 다른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술 한 잔, 커피 한 잔을 놓고 오랜 시간 대화할 여유가 있었고 깊은 대화 끝에는 서로 다름에 대한 이해, 삶에 대한 다른 관점, 영감 같은 것들이 보상으로 주어졌었다.


하지만 엄마들이 친구를 구하는 그 맘 때에는 그런 여유를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 시간적으로도, 심적으로도. 동네 친구들은 아이가 6개월 일 때쯤 사귀었는데 만날 때마다 혼이 쏙 빠졌다. 밥을 같이 먹어도 누군가는 일어서서 아이를 안고 어르며 먹어야 했고, 번갈아가며 기저귀를 갈거나 수유하러 자리를 떠야 했다. 대화에 집중한다는 것은 아이에게 소홀함을 의미했다. 지루함이라는 감정을 알기 시작한 아이들은 여지없이 짜증을 냈고 몸부림쳤다. 대화다운 대화를 하기가 힘들었다. 그저 겉핥기식 대화 속에 에너지만 낭비할 뿐이었다.


서로 다른 육아방식이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같은 월령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끼리 만나면 수면교육, 이유식, 아이의 교구나 책의 구입 문제, 기관에 보내고 안 보내는 문제, 영상을 보여주고 안 보여주는 문제 등 엄마들끼리 극명하게 의견이 갈리는 이슈들에 대해 어쩔 수 없이 내 입장을 내보일 일들이 생긴다.


예를 들어 이유식을 만들어 먹이는 사람과 사 먹이는 사람이 만나 대화를 하면 묘한 기운이 돈다. 시판 이유식을 먹이기가 꺼림칙해서 힘들어도 일일이 해 먹이고 있는 사람에게 시판 이유식을 먹이는 사람이 '사서 고생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사 먹이라'라고 하면 어쩔 수 없이 입을 닫게 되는 것이다. '불안해서 못 사 먹이겠어.'라는 개인적인 생각이 상대방에게는 '넌 어떻게 시판 이유식 같은 걸 먹일 수 있어?'라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을까봐서. 반대로 시판 이유식을 먹이는 사람 입장에서는 고생스러운데도 불구하고 일일이 해 먹이는 사람을 보며 미련스럽다 하면서도 내 새끼한테 미안한 마음이 왠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그냥 같은 동네에서 비슷한 시기에 애 낳은 것 말고는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끼리 육아 방식에 의견을 같이 할 가능성이 참 낮다.


사회인으로서는 충분히 유연하게 사고하며 나와 다른 의견도 존중할 줄 알던 사람들도 엄마가 된 직후엔 그게 어려워진다. 육아에 대한 자신감, 자존감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내가 잘 키우고 있는 건가?'라고 수없이 자문하게 되는 상황에서 나와는 다르게 육아하는 사람들을 보면 조바심이 날 수밖에 없다.


또 하나, 그 맘 때는 아이들 간의 낮잠이나 이유식 스케줄이 비슷하기도 힘든 시기이다. 어디론가 차를 타고 이동을 하거나 식사를 할 때 보통 아이의 낮잠 시간에 맞추기 마련인데 다른 아이와 함께 하게 되면 두 아이 중 한 명은 스케줄이 엉키어 하루 종일 징징대거나 대성통곡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영아기 아이에게 매일 일관된 스케줄을 제시하는 것이 정서적인 안정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일주일 중 하루 정도야 아이의 스케줄이 꼬일 것을 감수해가면서 엄마의 정신건강을 위해 만남을 가질 순 있지만 매일 같이 밖에서 임기응변식으로 먹이고 재우다 보면 아이는 예측되지 않는 상황들에 불안을 느낄 것이다.


글쎄. 


사실 이 모든 것을 차치하고도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삶의 질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정신없이 흘러가는 대화 속에서도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감정과 성향도 물론 존중한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육아 친구를 사귀는 것이 나와 내 아이의 성향에 맞는 일인지 한 번쯤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참고로 나는 영유아기 육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약간은 까다롭고 보수적으로 육아를 하는 편이다. 의 아이는 온순한 편이지만 먹고 자는 스케줄이 어그러지는 것에 굉장히 예민다. 그리고 내향적인 성격인지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나의 에너지를 급격하게 소진시킨다. 나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은 아이와 둘이 생활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추천한다. 남편이 퇴근한 뒤 아이를 맡겨놓고 온전한 혼자만의 시간을 갖거나 어떤 주말 홀몸으로 원래의 친구들과 익숙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훨씬 에너지의 충전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아이가 세 돌을 앞둔 어느 날이다.  


아이의 먹잠 스케줄은 여전히 때때로 변다. 지만 이제는 아이의 식사시간 못 맞추더라도 빵이나 우유로 간단히 끼니를 때우는 것이 가능해졌, 낮잠 시간을 맞추지 않고 차에 태워도 1시간씩 바깥 풍경을 보 잘조잘 떠들지루함을 이길 줄 안다.


엄마도 친구와 이야기를 좀 하고 싶다고 양해를 구하면 잠시나마 혼자 얌전히 놀아주기도 한다. 이젠 또래 친구가 집에 놀러 오면 서툴지만 장난감을 친구 손에 쥐어주며 선물이라고 한다던가, 같이 놀고 싶어 하는 기색을 보인다. 이제는 내가 동네 친구를 만들면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아이도 그 시간을 지루해하지 않을 수 있는 '때'가 된 것 같은데 그럴 필요가 없게 됐다.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아이와 나 단 둘만의 매일이 끝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세 돌이 지나면 아이는 기관에 가서 또래 친구를 만나게 될 것이고, 나는 아이가 기관에 가 있는 시간 동안 나와 죽이 잘 맞는 친구들을 만나 점심을 먹거나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딱 3년 아이와 나 단 둘이 존재하는 것같은 시간을 견디니 이런 시간이 왔다. 그 긴 기간 대부분을 아이와의 시간만으로 채우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소중했던 추억들은 모두 아이와 나 둘이 고군분투하는 중에 만들어진 것들 뿐이다.


짧게는 두 달, 길게는 1년 정도 만났던 육아 친구들과의 추억을 별로 기억도 나지 않고, 그닥 좋은 향을 지닌 기억도 없음을,  돌 전에 또래 노출이 거의 없었지만 아이는 주변의 걱정과 달리, 엄마와 긴 시간 탄탄하게 쌓아올린 정서를 바탕으로 건강하게 또래 사회에 적응해 나가고 있음을 전한다.

이전 06화 이런 세상에 아이를 왜 낳아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