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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제인 Apr 14. 2023

그럴 수도 있지

아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이가 알아버렸다


"엄마, 나는 커서 아기 안 낳을래."

6살 딸이 하는 말.


"왜?"
"아기 낳을  배 아프고 키우는 게 힘드니까"

"힘들 때도 있지만 엄만 너희들이 있어서 행복할 때가 더 많은데?"

"........"


무심코 흘려듣다가 퍼뜩 빨간 불이 켜진다.

"엄마가 때문에 힘들다고 생각해?"

"(끄덕끄덕)"



한 번도 아이 앞에서 힘들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2살 터울 세 아이를 키우는 하루하루는 매일이 전쟁이었지만 귀한  아이가 자기들 때문에 엄마가 힘들다는 걸 알게 하기 싫었다.



너 하나 보고 내가 산다


어렸을 때 내가 매일같이 듣고 자란 말이었다. 항상 참고 살아내는 듯한 엄마가 불쌍했다. 동시에 나 때문에 엄마가 참고 사는구나.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나는 내 아이한테 그런 자책을 심어주기 싫었다.


그런데 아이가 알아버렸다.

육아가 미칠 듯이 힘들다는 걸.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어


부모로서 내가 가진 영향력이 두려웠던 때가 있었다.

아이를 키우는 건 내 감정을 물려주는 일이었다.

내가 부모에게 받은 감정의 영향력을 알기에.

부모가 되는 것이 두려웠다.


고작 6살 딸이,

두 동생과 자기 때문에 애쓰는 엄마를 보며 아이를 낳기 싫다는 말을 했을 때, 너희들이 있어서 너무 행복해! 말로만 외쳤던 공허함을 들켜버린 것 같았다.


투명인간이 되고 싶었다.

어떤 말도, 어떤 행동도 보이지 도록.




인생은 무지개야


세 아이가 모두 유아기 시절.

아이는 백지고, 거기에 밑그림을 그리는 게 나였다.

내 아이에게는 밝은 색만 쓰고 싶었다.

내가 물려받은 감정의 무지갯빛 중에

보여주고 싶은 색만 골라내고 싶었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그럴 수 없는 게 인생 아니던가.


표면적으로 밝은 색만 쓰려고 하면 어두운 빛은 내 안으로 스며드는 법이다. 나에게 스민 어둔 빛은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되어 아이에게도 스며든다.


이제는 

아이가 알아야 하는 감정을 취사 선택하지 않는다. 




그럴 수도 있지


이번주는 부모 참여수업으로 매일 아이 학교에 갔다.

(세 아이의 학부모는 뭘 해도 3번은 반복해야 한다. )


1학년 아이들은 유독 부모를 기다린다. 수업참관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각자 부모 품에 안긴다. 중에 고개를 숙이고 혼자 앉아있는 한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 저 아이의 마음은 어떤 모양일까.


(부모에게) 서운함일까, 원망일까.

(자신에게) 부끄러움일까, 외로움일까.

(친구에게) 부러움일까, 질투심일까.


어떻게 이름을 붙여도 상관없지만, 아이들이 살면서 겪는 경험들을 트라우마로 만드는 건 어른들이라는 생각을 한다. 나 또한 내 아이를 기다리게 만든 적이 있다. 나를 기다렸을 아이 마음을 공감하는 걸 넘어서 내 행동에 죄책감을 가진 적이 있었다. 아이의 실망, 서운함, 외로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내 탓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이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것을 넘어서 죄책감을 가지면 아이도 부모의 감정을 금방 눈치챈다. 그리고 얕은 서운함은 곧 깊은 원망으로 바뀐다. 오히려 서운했던 마음을 금방 털어낼 수 있는 방법은 그럴 수도 있지! 하는 마음이다.


아이에게 해주지 못한 것, 해줄 수 없는 것에 나부터가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한다. 주고 싶은 게 있으면 무언가는 버려야 한다. 버렸기에 무언가를 얻었으며, 놓아야 하는 것에 마음 아파하지 않는다.



상처를 보듬는 넉넉한 마음가짐.

 아이에게 전해주고픈 긍정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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