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부임한 대대장은 부대를 시찰하던 중, 이상한 광경을 발견했다. 수풀로 가려진 공간에 낡은 벤치가 하나 놓여있고, 그 곳을 두 명의 병사가 지키고 있었다. "무엇을 지키고 있는가?" 병사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시찰이 끝나고 대대장은 중대장을 불러 이유를 물었다. 중대장은 본인이 부임하기 전부터 있던 근무 명령이라고만 했다. 부대에 가장 오래 있었다는 주임원사에게도 물었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대대장은 의아했지만 신경써야 할 중대한 업무가 이어지고 그 일은 곧 묻히고 말았다. 이후 대대장은 다른 부대로 떠났고, 다시 새로운 대대장이 부임했다. 그도 부대를 처음 시찰하는 날 이상한 광경을 발견하고 두 명의 병사에게 무엇을 하고 있냐고 물었다. 병사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경계근무를 서고 있습니다"
낡은 벤치를 지키게 된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부대가 창설되고 얼마 되지 않은 때, 상급 부대로부터 명령이 내려왔다. 병사들의 안정을 위해서 휴게공간을 마련하라는 것이었다. 부대는 그 조치로 곳곳에 벤치를 설치했다. 시간이 흘러 수풀이 우거진 벤치 하나가 유난히 빛이 바래고 낡았다. 이를 발견한 대대장이 중대장에게 보수를 하도록 명령했다. 행정관은 병사들을 시켜 급히 페인트칠을 하게 했고, 페인트가 마르기 전까지 병사 한 명을 배치하여 이를 지키도록 했다. 중대장은 대대장의 지시로 하게 된 일이기에 정식명령으로 임무배치할 것을 지시했고, 소대장은 교대명령서를 작성하여 24시간 병사들을 배치했다. 시간이 흘러 소대장과 중대장이 교체되었지만 임무명령서는 계속 작성되었다. 그리고 또 많은 시간이 지나 상급부대에서 명령이 내려왔다. 인근 부대에서 경계근무 사고가 있었으니 모든 경계근무는 반드시 2인 1조로 활동하라는 것이었다. 무수히 많은 계절이 바뀌고, 대대장이 바뀌었지만 부대의 규칙과 질서는 반복되어 이어졌다. 이 것이 바로 낡은 벤치를 두 명의 병사가 지키게 된 이유다.
- 채사장,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중에.
시스템의 무능을
나의 무능으로 착각하지 말 것
내가 퇴사하기 직전 근무하던 부서는 5개 팀과 30여 명의 부서원이 있었다. 시작은 나까지 두 명이었는데 새로운 팀장과 여러 번의 조직개편으로 2년만에 규모가 이렇게 커졌다. 조직이 커지면서 업무분장(R&R)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다른 부서의 업무를 이관받으면서 낡은 벤치를 넘겨받는 경우가 많았다. 나 역시 무엇을 지키고 있는지 모른 채 관행적으로 하고 있는 일들이 많았다. 문제는 왜 그렇게 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조직이란 오랜시간 동안 관습적으로 이어져오는 시스템을 따르기 때문에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역기능도 생긴다.
나는 조직보다,
시스템 안에 있는 개인의 문제에 주목했다.
나는 상사가 내 업무에 대해 질문했을 때 대답하지 못하는 상황을 극도로 싫어했다. 나의 무능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대대장이 무엇을 지키고 있냐는 물음을 던졌을 때, 벤치의 병사도 중대장도 대답하지 못했다. 낡은 벤치의 비밀은 그 곳을 지키는 병사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였다. 하지만 유능한 직원들조차 종종 스스로의 무능을 탓하며 번아웃에 빠진다.
직장인의 연륜은,
나의 능력과 시스템의 능력을
구분하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시스템의 능력을
나의 능력으로 착각하지 말 것
회사에서 성과를 내려면 내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던 때가 있었다. 연차가 낮을 때는 그 믿음이 어느 정도는 유지되었다. 하지만 10년차가 넘어가자 그게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5년 전쯤 기대 이하의 인사평가를 받고 팀장님께 이유를 따져 물은 적이 있다. 팀장님의 대답은 이랬다.
팀장 : 다른 팀원은 하청업체의 인력을 소싱해서 더 복잡하고 방대한 업무를 하고 있어요.
나 : 그 분의 업무는 10명이 함께 하고 있는데 그 인원으로 제 업무보다 정량적으로 10배 이상의 성과를 내고 있다고 보시는 건가요?
팀장 : .....
당시 납득할만한 대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평가는 바뀌지 않았고 그 때 깨달았다. 시스템에는 시스템이 답이라는 것을. 정량적으로 10배의 성과는 아니더라도 조직의 명분에 부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연차가 쌓이면 나의 역량보다 시스템을 만들고 조율하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
나의 노동은 왜 우울했을까
회사에 다닐 때 나는 지나치게 감정적이었던 것 같다. 일을 너무 내 일처럼 여겼던 것 같다. 거기에 자존심을 담았던 게 잘못이었다. 나의 논리와 조직의 논리가 충돌할 때가 많아서 힘들었다. 갈수록 스스로 납득되지 않는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가슴은 아닌데 머리는 조직의 논리를 따르라고 했다. 내가 조금 더 유연했더라면 그 둘을 현명하게 조율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다시 회사에 들어가도 똑같이 할 것 같다. 사람의 성향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퇴사하고 나는 혼자가 되었다.
예전처럼 일을 같이 할 팀이나 동료도 없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더 많아졌다.
시스템 안에 있을 때보다,
더 자유롭게 나의 일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단순히 회사에서 일했던 시간은 경력이 아니다. 회사를 버리는 순간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어떻게 나의 경력인가.
경력이라는 것은
조직이나 시스템이 없이도
내가 일할 수 있는 업이다.
- 송길영, 상상하지 말라 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