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란 게 참, 본능적으로 게으른 게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항상 시험 하루 전 벼락치기를 하고 커피머신이 버벅거릴 때가 돼야 한 번이라도 닦게 되고, 아들 머리가 귀를 덮은 지 한참이 지나야 미용실에 데려가게 되니까.
회사 일에서의 기한도 그렇다.
밥벌이하고 살아야 하고, 당장 주변에서 빨리 해달라고 하니까, 움직이는 러닝머신 위에 서있는 것처럼 다리를 움직이고 달리게 되는 것 같다.
그렇게 하루하루 의미 없는 듯 느껴지던 일상을 바쁘게 살아내다 보면 문득 한뼘 성장한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나름 인맥도 생기고, 일에서 보람을 느끼기도 하면서.
경험 상, 능률 측면에서만 보자면 일은 ASAP이 가장 좋은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일하는 기계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재미도 필요하고, 왜 내가 이 짓(?)을 하고 있는지 가끔은 의미 부여도 해 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일이라는 톱니바퀴에, 말 그대로, 갈려나갈 수도 있다.
난 그렇게 갈려 나가다가 건강을 잃고 나서야 최근 그 일이라는 놈에서 잠시 멀어져 있다.
가장 힘들었던 건 일의 우선순위가 없이, 뭐든 ASAP 일수밖에 없었던 업무 환경이었다.일은 지금도, 1년 전에도, 2년 전에도 항상 많았지만 일에 치이지 않았던 때에는 분명히 일의 기한과 우선순위에 대한 합의가 전제되어 있었다. 합의를전제로 자율성과 책임감을 가진 일을 마친 뒤의 성취감이 내 자리를 지키게 해 준 원동력이었다.
하루에도 몇 통씩 걸려오는 업무 관련 통화, 수십 통씩 쌓이는 메일함, 수백 건씩 쌓이는 업무 메신저 이 모든 것을 ASAP으로 처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믿을 수 있을까, 날 아프게 만든 그 팀장이 바로 그런 스타일이었다.)
MBTI 종류에 ASAP을 추가한다면 이 정도? (주의! 내 맘대로)
"일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는 법"이라는글에서 일과 내가 건강하게 공존할 수 있게 하는 팀장의 역할에 대해 읽고 너무 공감을해서 잠깐 소개해 보려고 한다.
일이란 놈에게 치이지 않으려면 팀장 혼자서 급하게 스케줄을 짜서 팀원에게 통보하는 대신, 다 같이 합의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는 게 요지였다. 그리고 그 스케줄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중간중간 적절한 타이밍에 보초를 세워두고 감독하는 게 팀장의 역할이라고 했다.
적절한 타이밍이라는 게 가장 중요한데 이 일과 관련된 모든 업무(전화, 메일, 메신저)를 감독하면 절대 안 된다. 팀장이 세워둔 보초들 사이의 시간에는 팀원들이 자율성과 책임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많은 팀장들은 일의 결과를 빨리, 그리고 완벽하게 보고 싶은 성향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팀장님 MBTI는 ASAP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와닿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일이랑 사람이랑 둘 다 살아야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