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부모님 따라 성당에 다니며 유아세례를 받기는 했지만, 내 마지막 신앙생활은 대학교 때 썸 타던 오빠랑 주말에 만나려고 했던 게 마지막이었다. 불순한 의도여서였는지 신은 우리를 이어주지는 않으셨다 ^^;
난 내 행동과 선택을 가장 믿어왔다.
늘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나의 가장 큰 자산이었고, 그 결과는 나를 배신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혼자 열심히 해서 잘 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걸.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 때문에 변화무쌍하게 변할 수 있는 게 바로 인생이라는 걸.
신을 믿으면 다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거기서 이야기하는 초월적인 어떤 것이 존재하는 건 맞는 것 같다.
아이가 어릴 때는 내가 하는 말과 행동, 딱 그만큼만 보고 배운다. 내가 주는 음식만큼만 먹고 딱 그만큼만 큰다. 하지만 또래관계가 생겨나는 때부터 아이가 자라는 속도는 내가 아이에게 제공한 것과 비례하지 않게 된다.
학생 때는 내가 공부한 만큼 점수가 나온다.
신입사원 때는 내가 한만큼 배우게 된다. 내가 일에 쏟은 그 시간만큼 딱 그만큼 일이 진행된다. 하지만 연차가 어느 정도 쌓인 이후부터는 내가 투자한 노력과 성과는 비례하지 않게 된다.
인생은 불공평하다.
사회에 나오면, 그리고 나이가 들면 누구나 이 사실을 깨닫게 되는 때가 온다. 단순히 어디서 들어서 아는 게 아니라 경험으로 깨닫게 된다. 그 순간이 오면, 이제 더 이상 정해진 답을 맞히지 말고, 나만의 답을 만들어 가기 시작해야 하는 때가 된 것이다.
지난 2주간 아무런생각 없이 칩거를 했다. 글을 써보려 해도 한 문장도 써지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그냥 두었다. 넷플릭스에서 김남주, 지진희 주연의 미스티(2018)를 정주행 했다.
드라마 속 고혜란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을 좇는 야망가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고 맞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진정한 용자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지키고 싶은 것을 미친 듯이 하다 보면 그 장단에 맞추고 싶은 사람들이 꼭 나타난다. 상황에 따라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된다. 소신을 포기하고 져 줬을 때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을 포기하고, 자기에게 등을 돌릴 사람들에게 당당히 미움받기를 선택한다.
결혼생활, 직업, 성공의 의미 등 드라마 속 그녀를 바라보는 여러 가지 관점이 있겠지만, 나는 그 소신과 뚝심, 그리고 용기가 가장 인상 깊게 남았다. 아내, 며느리, 기자, 그리고 앵커로서 정해진 답을 잘 맞혀가는 게 아니라, 본인이 생각하는 신념에 따라 답을 만들어 가는 모습.
난 지금껏 정답을 잘 맞혀 왔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큰 성공이나 부를 누린 건 아니지만, 최소한 큰 부족함 없는 조건에서 순탄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이 방식으로 능력을 발휘하기엔 한계에 부딪혔다. 어떠한 주장도 하지 않고, 정해진 룰과 권위를 따르면서 내 생각을 무의식 중에 억눌러 왔다. 내 생각대로 했을 때 따라올 책임을 회피하고 싶었다.
자신이 없었으니까.
막 20대가 됐을 때는 시간의 자유가 마냥 좋았다.
막 30대가 됐을 때는 돈의 자유가 마냥 좋았다.
곧 시작될 내 40대에는 나다움의 자유를 마음껏 누려볼 생각이다.
삼재(三災)가 들어온다는 올해들삼재를 호되게 겪으며 느낀 바가 크다. 지금까지 가장 효율적이었던 방식처럼 자동적으로 "네, 알겠습니다."를 모토로 지내왔던 것 같다. 정해준 일을 잘 해내는 게 일 인분의 역할이라고 믿으면서. 나를 비추는 거울을 너무 오래 외면해왔다.
지난 2주간 거울을 보며 느낀 게 있다. 찬 바람이 시작된 10월, 아무리 수분크림을 치덕치덕 발라도 불과 몇 시간 후면 마른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지는 내 피부다. 난 이제 더 이상 스킨만 발라도 반짝이는 20대가 아니다.
더 정성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어 주어야 하고, 더 오랜 시간 거울을 들여다보며 가꾸어 주어야 한다. 그게 20대와 30대에 여기까지 정직하게 커 준 나에 대한 사랑이고, 그렇게 만들어온 내 생각을 지켜내는 진짜 용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