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책을 읽던 아이에게

안네의 일기, 그리고 처음 열린 시선

by 모모

신랑과 함께한 지 20년이 넘었다.

그 시간 동안 그가 책을 읽는 모습을 떠올리면, 손에 꼽을 만큼 적다.

큰아이가 태어난 뒤 “사진을 잘 찍어주고 싶다”며 사진 관련 책을 몇 권 넘겼던 게 전부였던 것 같다.


그런데 올봄 무렵부터, 그의 아침이 달라졌다.

눈을 떠 거실로 나가면 소파 한쪽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매달 읽고 싶은 책을 고르고, 틈틈이 페이지를 넘긴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말투와 시선, 삶을 대하는 태도에 작은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고,

나는 그게 참 멋져 보였다.


그를 보며 문득, 내가 ‘첫 인생책’을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나는 어릴 적 책을 많이 읽는 아이는 아니었다. 지금처럼 도서관도 가깝지도 않아, 그 시절엔 책을 읽는 일엔 조금 더 많은 수고와 마음이 필요했다.


다행이라면, 엄마가 책을 좋아하셨다는 것.


공부하다 지루해질 때면 내 방 책장에 꽂혀 있던 엄마 책을 꺼냈다.

세로로 쓰인 오래된 책들도 있었는데, 한 줄 한 줄 손끝으로 짚어가며 읽는 일이 묘하게 재미있었다. 모르는 한자가 나오면 한참을 들여다기도 했다.


몇 시간이고 그렇게 앉아 있다 보면, 나도 어른의 세계로 들어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어린이 출입금지 구역’을 몰래 통과한 아이처럼.


그 무렵이었다.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책장에 꽂힌 얇은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안네의 일기’.


솔직히 처음엔 시시해 보였다.

나는 두꺼운 어른 책을 읽는다고 으쓱해 있었는데, 친구는 누군가의 일기나 읽고 있다니 말이다.

친구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구경이나 해볼까” 싶어 책을 꺼내 들었다.


그날, 그렇게 내 첫 인생책을 만났다.


친구가 방으로 돌아왔는데도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책을 빌려줄 테니 놀자고 했지만, 내 머릿속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집에 와서 단숨에 읽고도 여운이 가시지 않아,

읽고 또 읽었다.


빌려 온 친구 책을 속 붙잡고 있으니, 엄마는 더 두꺼운 판본을 사주셨고,

엄마의 친구는 집에 있던 어른용 책을 선물해 주셨다.

그렇게 나는 같은 책을 여러 번, 다른 모습으로 읽게 됐다.


6학년 때는,

안네가 일기장에 ‘키티’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처럼,

나도 일기장에 ‘짱아’라는 이름을 붙여 썼다.

“짱아야, 나는 오늘…”


무엇이 나를 그토록 그 책으로 끌어당겼을까.


처음엔 그들이 처한 상황에 마음이 쓰였다.

내 또래의 아이들이 겪었다는 사실이, 어린

나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로 다가왔다. 들키지 않기를 바라며 숨을 죽이고 책장을 넘겼다. 이미 결말을 알고 난 뒤에도 심장은 여전히 두근거렸다.


그런데 몇 번을 반복해 읽자, 다른 장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치를 피해 도망 다니고, 좁은 집 안에서 세상과 단절된 채 숨어 지내야 했던 삶.

하루는 늘 위태롭고 불안해야만 했다.

그들의 현실엔 분명 짙은 어둠이 어울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곳에도 내가 아는 ‘하루’가 있었다.


부모와 자식으로 살아가는 관계가 있었고, 형제자매와 사촌들이 모여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어떤 순간에는 웃음이 흘렀고, 사랑이 있었다.


“언젠가 이곳을 나가면”이라는 희망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도 품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가족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걱정하고 그리워했고,

어떤 날에는 그저 즐겁게만 살아내기도 했다.


내가 상상하던 ‘참담함’과는 다른 결의 하루였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자

‘그 이후의 기록은 없다’는 문장이 나왔고, 사진들이 이어졌다.

나는 한동안 다음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그 이후로 사람을 보는 눈이 조금 달라졌다.

나의 시선이 ‘나’에서 ‘세상’으로 돌려달까.


사람들의 겉으로 보이는 모습보다,

그 안에 있을 이야기가 먼저 떠올랐다.


그리고 보물찾기 하듯,

그저 그런 하루에서 '고마움 하나 찾기'라는 습관이 그때부터 시작됐던 것 같다.


아마 신랑에게도, 그때의 나처럼 어딘가에 작은 등이 켜진 것 같다.


가끔 우리 아이들이 책을 잘 읽지 않는 것 같아 걱정이 앞설 때가 있다.


그래도 문득 생각한다.

언젠가 이 아이들도 자기만의 책 한 권을 만나,

그 아이의 세상에도 그렇게 작은 불이 하나 켜질 거라고.

그와 나처럼.


아이들은 어떤 이야기에서 마음이 움직일는지,

오늘은 그게 조금 궁금해진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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