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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달 Sep 18. 2020

내가 받은 사랑이 없어서, 아이한테 줄 사랑도 없어요

응 핑계대지마

2020/9/18/금 


내가 자주 듣는 말 중 하나다. "새벽달님은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셨나봐요. 어쩜 그렇게 사랑이 많으세요?" 네...에? "저는 어려서 부모에게 받은 사랑이 없어서 그런지,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고 아끼는 게 너무 힘드네요. "


이말은 곧 이런 뜻이다. "제가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지 못하는 것은 제 탓이 아니라, 나를 잘못 키운 우리 엄마 탓이에요. 그러니까 저는 이번 생은 망했구여, 저희 애들도 사랑 받고 크기는 글렀어요. 하지만 이건 다시한번 강조하는데 제 탓이 아니고요, 우리 친정엄마 탓이라고요. 아시겠어요?"


남탓, 남 핑계 대는 건 쉽다. 도망가기에. 덜 아프고 덜 피곤하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 남탓만하면 아무런 변화도, 성장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치명적 손해가 따른다. 당신이 그 손해를 감당하고자 한다면 실컷 남탓만 하고, 신의 탓만 하고 살다가 죽으면 된다. 그러난 똑똑한 나는 오늘도 ‘내탓’을 한다. 여기서 말하는 ‘내탓’ 이란 자학이 아니라 ‘자기돌아봄’이다. 남을 바꿀 수는 없고, 이미 지나간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나는 내가 어찌할 수가 있다. 초점을 ‘남’에게서 ‘나’에게로 돌리면 뜻밖의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뜻밖의 실마리를 찾기도 한다. 변화와 성장은 ‘남탓’이 아니라 ‘내탓’, ‘자기돌아봄’에서만 거둘 수 있는 열매다.


그러나 내탓은 쓰라리다.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처럼 따끔하다. 게다가 인간은 합리화의 귀재라서, 자칫 방심하면 ‘자기변명’만 늘여놓는 방어전을 펼친다. 반복적으로 걸려 넘어지고 실패하는 원인을 나에게서 찾지 않고 외부에거 찾는다. ‘내탓이오’는 늘 어렵고, ‘니탓이야’는 참 쉽다. 저 여자가 아이에게 저렇게 살갑고 너그럽고 따뜻한 건, 저런 사랑을 친정엄마에게서 듬뿍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거야. 그런데 그런 사랑 받고 자란 인간이 있을까? 엄마가 아무리 따뜻한 사랑을 의식적으로 줬다 해도 아이에게 숨막히는 간섭과 옭죔 일 수 있고, 엄마는 아이를 독립적으로 키우기 위해 의식적으로 ‘자유’를 줬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그것을 ‘방임’으로 느껴 늘 엄마의 사랑과 간섭을 목말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만큼 육아는 섬세하고 아이마다 다르다. 게다가 우리 부모 세대는 어떻게 육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없었고 먹고사느라 바빴고, 사회 재건하느라 바빴던 시대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섬세한 사랑’ 받으며 자란 내 또래는 거의 없으리라 생각된다.


우리 부모님도 늘 여유가 없으셨다. 아빠는 일에만 전념하셨고, 엄마는 예민하고 신경질 적이었다. 까다로운 할머니를 평생 모시면서 극성스런 삼남매 키우는 것을 늘 버거워 했고 도망치고 싶어했다. 몸도 마음도 많이 아팠던 엄마는 짜증이 많았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는 날도 많았다. (엄마가 울면 아이애겐 공포다) 자식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게느냐마는, 그 사랑을 성숙하게 표현하는 부모는 많지 않았던 시절 평범한 엄마였다. 그래도 우리는 다들 이러고 사는거 아닌가 하면서, 약자로서, 부모가 쏟아내는 감정을 받아내는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어 그렇게 성장했다. 이런 나에게 큰 충격을 줬던 것은 우리 시어머니였다.


친정이나 시댁 어른 도움 없이 맞벌이로 아이 하나 키우면서 발 동동 구르던 우리 부부에게 둘째가 생겼다. 더이상 두 아이를 돌보며 맞벌이 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나는 염치불구 시어머님께 손을 벌렸다. 당시 중국에 주재원으로 계셨던 시아버님은 퇴직을 앞당겨 서둘러 귀국하셨다. 둘째가 태어나면서 시부모님과 함께 살기 시작해서 그 아이가 12살이 되어 분가를 하기까지 오랜 세월 함께 살았다. 시어머님의 삶에 대한 태도는 나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하루는 여섯살 1호가 부산을 떨다가 식탁위에 있는 물컵을 쳤다. 바닥에 떨어진 컵이 산산조각이 났던 그 순간 어머님의 첫마디는, “괘않나? 다친 데는 없나? 얼마나 놀랬노..” 였다. 나는 순간 멍했다. 왜냐면 난 소리를 지를 참이었기 때문이다. “야, 조심하지 않고!!!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아까부터 그렇게 부산을 떨더니 기어코 사고를 저지르네. 저리 안 비켜?? 에휴.. 이걸 또 언제 다 치워. 내가 못살아 못살아. 지겨워 지겨워.”  친정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겁에 질린 아이에게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고음으로 퍼부었던 엄마의 저주와 비난. 쏟아지는 그 폭언을 울먹이며 견디어야 했던 어린 내가 오버랩 되면서 눈물이 났다. 아... 어린 시절 나에게 일상이었던 그것이, 폭력이었구나. 고통이었구나. 너무 많이 반복되어 무뎌졌던 감정이었구나. 어린 시절 내가 불쌍해서 눈물이 났다.


사실 아이는 ‘이 컵을 박살내서 엄마를 엄마를 골탕먹여야지’라는 생각으로 물컵을 깬 것이 아니다. 모르고 깬 것이다. 실수다. 우리도 가끔 국을 쏟거나 설거지하다가 그릇을 깨는 실수를 하곤 한다. 그때마다 남편이 달려와서 죽일듯이 고함을 치며 이걸 왜 깼냐고 타박한다면 억울할 노릇이 아닌가. 이것은 혼낼 일이 아니다. 아니, 식사가 끝났는데도 물컵을 식탁위에 방치한 어른 탓 일수도 있다. 따지고보면 혼낼일도 아닌 것에 우리는 목숨걸고 혼내고 아이를 쥐잡듯이 잡아 모욕하는 드라마를 찍곤 한다. 혼내야 할 것과 아닌 것을 분별하는 이성이 필요한데, 당장 성숙하지 못한 엄마는 ‘나 힘든거’만 생각하고 ‘애 놀란 것’은 생각하지 못한다.


내가 놀란 것은 그 상황에서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어머님의 말이었다. “괘않나? 다친데는 없나?” 어머님은 손주의 안전이 걱정되어 혹시 다친곳이 없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를 챙겼고, 그리고 나서 마음까지 챙겼다. “얼마나 놀랬노.” 참 어른이다. 아이는 유리컵이 깨져 놀란 것보다 엄마가 얼마나 자기에게 화를 낼까, 얼마나 속상해 하실까가 더 공포다. 그런 아이의 마음까지 살피는 그 말 한마디에 아이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누군가가 내 힘든 마음, 놀란 마음을 알아주고 달래주면 눈물이 나온다. 아이가 그제서야 운다. 엄마가 소리소리 지르면 ‘내가 왜 이렇게까지 모욕을 당해야 하는건데? 일부러 컵을 깬 것도 아닌데!!!’ 하는 억울함과 분노가 일지만, 엄마가 ‘니 얼마나 놀랬노’ 하고 내 마음을 알아주면 아이는 안심과 동시에 미안한 마음이 인다.


어머님은 이런 말로 마무리를 하셨다. “괘않다 괘않다. 니만 안 다쳤으면 됐다”


진실로 진실로 그러하다. 그 컵하나 깨진 것이 뭐라고. 우리 아이는 그깟 1-2만원짜리 컵보다 훨씬 소중한 존재가 아닌가.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컵 하나 깨졌다고, 그거 치우는거 힘들다고 그렇게 애를 잡고 소리지르며 모욕하는 것일까. 생각하면 참 어이없는 폭력이다. 혼낼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낀 그날 이후로 내 분별력은 진화했다. 따지고보면 아이들은 혼날 일이 거의 없다. 무슨 ‘악의’를 갖고, 엄마를 골탕먹이기 위해 나쁜 행동을 하는 아이는 없고 다만 몰라서 어떤 잘못을 저질르는 경우는 있다. 이럴 때는 인생 선배로서, 어른답게 차분히 설명해야 한다. 따끔하게 혼내는 것은 금물.그것은 사태와 관계를 악화시키는 결과만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어. 몰라서 그랬구나.’ 라는 말로, 아이가 민망하지 않게, 아이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게, 조심스레 말을 꺼내고 차분차분 설명해 주어야 한다. 아이는 그 실수 자체만으로도 수치심과 공포를 느끼기 때문에 그 마음 먼저 달래주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정말 어이없는 것으로 애를 잡으며 수치심을 강화시킨다.  한 엄마는 초1 아이가 왼쪽과 오른쪽을 구별 못해서 쥐잡듯이 혼냈다고 한다. “어떻게 왼쪽 오른쪽을 몰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엄마의 눈빛과 장탄식에 이미 아이는 깊은 수치심을 느낀다. 내가 무슨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거구나.라는 잘못된 생각마져 심어준다. “니가 밥 먹는 손이 그쪽이 오른손이잖아!!!!! 왼손은 그 반대손이고!!!!! 너 바보야? 어떻게 그걸 몰라????” 라는 말로 쐐기를 박는다. 엄마는 아이를 바보로 규정했고, 아이는 평생 자기를 멍청하다고 생각할 근거를 낚아챘다. 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이게 혼날 일인가? 이건 마치 남편이 주식 초보인 나에게 “너 어떻게 etf  몰라?  뭐라고? roe 가 뭐냐고? 야 너 그냥 주식 하자 마라. 기본이 안되어 있어” 하는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말이다.


이런 저주와 폭언을 마주한 아이는 억울하고 황당하다. 사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지력이 되고, 부당한 폭언을 맞서 따질 배짱이 있는 아이라면 소리 질러야 마땅하다. “실수 잖아! 나는 아직 어리잖아! 배우면 되잖아!! 배우고 있잖아!! 이런 사소한 걸로 나를 바보취급하는 엄마가, 당신이 바보야!” 라고 외쳐야 한다. 그런 아이로, 그런 인간으로 성장해야 옳다.


내 아이가 장차 커서 사회에서 부당한 폭언과 폭행을 당했을 때, 아. 이것이 무례구나, 모욕이구나, 폭언이구나, 폭행이구나를 민감하게 알아채고, 분별하고, “이건 아니잖아!” 하고 외칠 수 있는 당당한 어른으로 자라길 원한다면, 피해의식, 자기연민 버리고 반면교사. 내가 받은 고통, 폭언, 부당함 되물림 하지 않기. 내 세대에서 끊기. 나 받은 사랑 없어서 너한테 사랑 못주네 타령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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