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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사람 Jul 22. 2020

[쓰는 요가]코함 코함하며 운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제는 내가 좋아하는 H쌤의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H쌤이 우리 요가원의 수업을 맡은 지는 한두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내가 느끼는 내적 친밀감은 그 시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올해 들어서 뭔가 새로운 아사나들에 도전해보고 싶은 욕구들이 샘솟던 내게, 쌤의 고난도 플로우 수업은 마치 단비와 같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하누만 아사나도 처음 해보고 (물론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드롭 백에도 도전해봤으니 말이다.


하지만 단순히 아사나 때문에 좋아하는 건 아니다. 선생님마다 조금씩 다른 수업 스타일들이 있지만 H쌤은 늘 수업 시작 전에 가부좌를 틀고 잠깐의 명상 시간을 갖는데, 그때마다 아주 고요한 목소리로 책의 글귀나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이야기들을 들려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엔 요가 만트라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요약하면 이러한 이야기다.


어머니 자궁 속에 있는 태아는 일곱 달이 되면 그 영혼에게 과거와 미래의 지식이 주어진다. 이때 태아의 영혼은 자신이 과거에 무엇이었으며, 미래에 무엇이 될 것인지를 알게 된다. 삶의 과거와 미래가 스쳐 지나가자 놀란 태아는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든 장애물에 부딪힌다. 그래서 신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태아는 ‘소함’이라고 울부짖게 된다. ‘소함’은 산스크리트어로 ‘그것이 바로 나’라는 뜻이다. 하지만 아홉 달 동안 자란 태아가 자궁 밖으로 나오는 순간 ‘코함 코함’이라고 울기 시작한다. 코함은 산스크리트어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뜻이다.


사실 잘 알아들은 것처럼 적었지만, 집에 와서 선생님의 이야기를 검색해보는 나는 마치 “거침없이 하이킥”의 정일우와 같았다. 회자정리라는 말로 이별을 고한 우등생 여자 친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회자적리, 혜자적리, 회자종니’ 등등의 말로 검색을 해보며 답답해했던 일우를 기억하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의 나이...) 나 역시 집에 돌아와 우함이었나 오함? 소함? 구함? 온갖 단어들로 구글링 끝에 소함과 코함이라는 사실을 알아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내가 제대로 이해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눈을 감고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뱃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깨달은 태아가 정작 태어나서는 자신의 누구인가를 알아가는 여정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니 무언가 마음속에서 뜨거운 것이 또 치밀어 올랐다. 나는 누구인가. 사실 인생이라는 게 거창한 행복, 성공, 사랑을 다 떠나서 결국에는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일 테니 말이다. 조성모의 가사처럼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우리는 우리를 모른다. 사랑할 때나 일을 할 때 나한테 이런 면이 있었어? 하고 놀란 경험이 누구에게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요가를 시작한 후에 또 새롭게 알게 된 내 모습들이 있다. 하타 요가를 할 때 한 동작이 빨리 마무리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면 내가 이렇게도 무언가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나 싶은 생각부터 옆 사람과의 실력을 비교하는 나를 볼 때, 어떤 아사나를 성공하고 종일 뿌듯해하는 나를 보면서 낯선 순간들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야기의 핵심은 과정이 아니겠는가?’ 내가 좋아하는 대사처럼, 매트 위에서의 수련도 결국에는 아사나의 성공이 아닌, 아사나를 향해가는 과정이 더 핵심인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든 게 사실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요가가 단순히 동작이 아니라 수련이라는 말의 의미를 조금씩 알 것 같다. 가장 먼저 스치는 생각은 ‘살람바 시르사아나사(머리서기)’를 연습하던 때이다. 시르사아사나는 말 그대로 머리로 땅을 지탱해 물구나무처럼 거꾸로 서는 자세이다. 이 말도 안 되는 자세를 선생님들이 처음 보여줄 때는 ‘저는 이번 생은 글렀어요. 다음 생에나 해 볼게요’ 생각했지만, 나는 작년 겨울에 믿기지 않게 머리 서기에 성공했다. 세상에 땅에서 발이 떨어지다니! 허리가 펴지다니! 내가 거꾸로 서다니! 지난겨울 그런 감격의 순간이 있기까지 수도 없이 매트 위에서 넘어진 내가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사소한 것들에도 겁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요가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머리 서기 자세를 연습할 때는 넘어지는 게 그렇게 두려웠다. 허리가 나가는 거 아닌가, 모가지가 부러질 것 같은데. 조금만 집중이 흐트러져도 거꾸로 선 내 몸은 휘청이고 넘어지기 일쑤였다. 조금만 하면 될 것 같은데 왜 안 되지 답답한 마음에 어느 선생님께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도대체 어떻게 해야 머리 서기에 성공할 수 있는 거예요?” 선생님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면서 얘기했었다.


“계속 넘어지시면 돼요. 그리고 다시 하면 돼요. 넘어지는 거 별거 아니에요”


아... 이 무슨 당연한 말의 대잔치란 말인가. 하지만 그 말이 내 머리를 딩-하고 울렸다. 그래 기껏해야 넘어지는 거밖에 더 되니? 또 일어서서 하면 되지. 그때부터였다. 나는 넘어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수도 없이 넘어졌고 수도 없이 다시 일어섰다. 내가 그렇게 두려워했던 넘어지는 일은 생각보다 별일 아니었다. 허리가 나가는 것도 아니었고, 팔이 부러지는 것도, 목이 부서지는 일도 아니었다. ‘아 넘어졌네’ 생각하는 순간 매트 위에 다시 서 있는 내가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나도 모르게 드디어 거꾸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세상에 내가 정말 거꾸로 설 수 있는 사람이었단 말인가. 나도 몰랐던 나 자신이 매트 위에서는 자꾸만 찾아왔다.


H쌤은 요가는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에의 중독이라고 했다. 물론 아사나에 한정된 것은 아니겠지만, 그 말의 의미를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요가를 할 때만큼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있을까. 수업 시간에 선생님들한테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숨 쉬세요’ 와 ‘집중하세요’이다. 그리고 이제야 자신에게 집중하라는 그 말이 얼마나 큰 힘을 갖고 있는지 이제는 느껴진다. 수업 시간에 옆 사람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내가 너무 뒤떨어진 건 아닌지 살짝 곁눈질만 해도 자세는 금방 흐트러졌다. ‘할 수 있어. 못해도 괜찮아. 할 수 있는데 까지’ 타인이 아닌 오직 나에게 집중했을 때에야 아사나가 찾아왔다.


그런 깨달음들이 요즘의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라고 한다면, 너무 거창한 걸까. 일을 쉰 지 그래 봤자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나는 불안해지고, 타인들과 자꾸만 비교하게 된다. 뭔가 꿈을 이루기 위해서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지만, 이 나이에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시작도 전에 망설이게 되고 할 수 있을까 자꾸만 주저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살람바 시르사아나사’를 할 때처럼 ‘우티타 하스타 파당구쉬타나’를 할 때처럼 옆 사람에게 곁눈질하지 말고, 내 안에 집중하자는 생각을 한다. 할 수 있어, 못해도 괜찮아, 할 수 있는 데까지.


그리고 오늘 아침 수련에서는 또 다른 감사함이 있었다. 늘 노트북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직업적인 특성 때문인지 나는 유독 어깨를 여는 동작에 취약한데 오늘 아침 S쌤의 수업에서는 역시나 어깨를 여는 동작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자세는 안 되겠지 미리 포기하고 자세를 취하지 못하는 내게 S쌤이 다가왔다. ‘으.. 안 돼요’하고 앓는 표정을 시전 했지만, 선생님은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는 걸 알아요’라며 자세를 만들어주셨고 ‘어? 되네?’ 하는 걸 알게 되자 반대편 자세는 선생님의 도움 없이도 만들 수 있었다. 왜 해보기도 전에 안 된다고 생각했을까. 자꾸만 스스로에 대한 불안이 자라는 요즘, 내가 할 수 있다는 걸 믿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오늘 하루 내내 힘이 되었다는 걸 쌤은 모르겠지?


코함 코함 하며 울던 나는 그래서 오늘 또 매트 위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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