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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사람 Jul 23. 2020

노트북에 쏟은 커피만큼의 한심함으로 매트 위에 서서

프로그램이 끝나고 바쁜 날들이 멈춰서인지, 간만에 고민이 참 많은 시절이다. 이렇게 쉴 때 자신을 잘 돌볼 수 있는 건강한 멘탈의 인간이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나는 자학의 신이다. 아침에 일어나 요가를 하고 커피를 내려 동네 공원 한 바퀴를 돌고 챙겨보지 못한 예능에 영화 드라마들을 하나둘 클리어 하다 보면 잠들기 전에 맥주 한 캔이 생각나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또 새벽이다. 빨래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쓰레기도 버리려고 했건만. 어쩜 이렇게 아무 일도 안 하는데 시간이 이렇게도 잘 가는 걸까. ‘와 오늘 하루 뒹굴뒹굴 잘 쉬었네’ 생각하면 좋을 텐데 나는 ‘와 오늘도 1도 안 하고 하루가 끝났네. 내 존재 무엇. 숨 쉬는 것 말고 한 게 없구나’ 자학하게 된다. 내일은 게으르게 살지 말자 다짐하며 잠들지만, 또 늦은 시간에 일어나 반복되는 게으른 하루. 반복되는 자학. 당장 일을 시작하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스스로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일까.


‘자학의 신’인 나와 달리 남자친구는 ‘긍정의 아이콘’이다. 가끔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는 나 자신을 나무라는 이야기하다 보면 그는 정말 별거 아니라는 듯 답하곤 한다. ‘게으른 하루를 보내고 싶은 건, 네 몸이 그만큼 쉬고 싶었던 거지. 침대에만 있어’ ‘지금까지 그렇게 한 가지 일을 쉬지 않고 오래 해온 네가 나는 자랑스러워’ ‘맥주를 마시고 싶으면 마셔. 고민하지 마.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괴로워하지 마’ 어쩜 이렇게 다른 사람들끼리 만났을까 싶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땐 그래 그렇지 싶다가도 잠깐이다. 오늘은 알바로 하는 작은 프로그램 때문에 몇 가지 이슈를 정리하며 나는 또 스트레스가 밀려왔다. 이럴 땐 내가 한 명 더 있어서, 내가 화나는 지점에서 똑같이 화를 내주며 같이 맥주를 마셔줬으면 싶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나 이렇게 화가 나” 이야기를 하기까지는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니까 결국엔 혼자 삭히고 마는 쪽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오늘은 친구들이 있는 단톡방에 요즘 답답하다는 이야기를 꺼냈는데 다들 하소연을 했지만, 누구는 소설을 쓰고 있고 누구는 드라마를 쓰고 각자 구상한 작품 얘기를 들으니 결국에 한심하게 사는 건 나뿐인 것 같았다.


“왜 이렇게 게으를까” “왜 이렇게 할 줄 아는 게 없을까” 요즘 내가 반복하는 물음이다. 정말이지 나는 할 줄 아는 게 없다. 그 흔한 운전면허도 컴퓨터 자격증도 없을뿐더러, 남들은 자취를 오래 하면 자취 요리의 신이 된다던데 라면 하나 겨우 끓이는 나는 내세울 스펙도 취미도 없다. “뭐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은 받으면 그냥 “혼맥하면서 영화 보는 거요” 그나마 요가를 시작해서 다행이지 정말이지 그게 다인 사람이다. 여태 방송만 하며 살았는데, 이럴 거면 이우정 작가처럼 대작가라도 되라지. 어느덧 마흔이 가까워지는 나이, 앞으로 몇 년이나 방송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요즘엔 좀 억울하다. 남들처럼 쉴 때 쉬어보지 못하고 일만 했는데, 보너스 한 번 퇴직금 한 번 받아보질 못했는데, 할 줄 아는 건 이거밖에 없는데 이 일의 수명이 다 되어간다니 말이다. 친한 피디는 술을 마실 때마다 “나는 이제 2~3년밖에 안 남았어. 나보다 형이고 아직 일하는 사람 00형 밖에 없잖아” 그렇다. 본사 피디가 아니고서야 피디들 역시 제작사를 차리지 않는 이상 수명은 거기서 거기고. 나이가 들수록 감 떨어지는 일에 예민해진다. 나 역시 후배 작가들이 쓴 자막을 보며 모르는 신조어가 있을 때는 흠칫흠칫 놀라게 되고, 난생처음 들어보는 아이돌이 요즘 대세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아 이제 정말 하산할 때가 된 건가 싶으니.


여태 해온 건 방송뿐이요 할 줄 아는 건 1도 없는 인간이라서 요가 지도자 자격증을 따볼까 욕심이 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도 뭐 하나 할 줄 아는 게 있어요 좋아하는 게 있어요’라는 증거 같은 것 말이다. 사실 오늘 짜증이 났던 이유는 스케줄을 정리하면서, 금요일 날 내가 좋아하는 쌤의 수업을 못 가게 되었기 때문도 있다. 쌤한테 지도자 과정 상담을 받고 싶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내가 이런 일이 짜증이 나다니. 게다가 커피를 마시며 넷플릭스를 뒤적거리다 노트북에 커피를 쏟았는데, 갑자기 내가 너무 한심해서 눈물이 났다. 그냥 주둥이로 마시기만 하면 되는 건데 그것도 못 하니. 그러다 이렇게 집에서 잡생각에 자학이나 할 바에 오늘은 저녁 수업을 두 시간 연달아 듣기로 했다.



특히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수요일 저녁 쌤이 요가원에서 마지막 수업을 하는 날이다. (쓰다 보니 다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 H쌤은 아쉬탕가와 하타 수업을 하는데, 우리 요가원에서 아쉬탕가 수업은 수요일 저녁 시간 한 타임뿐이라 매주 놓치지 않으려고 나름 출석 도장을 열심히 찍었다. 지금에야 아쉬탕가와 하타가 최애 요가가 되었지만, 작년에 처음 아쉬탕가 수업을 들었을 땐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블라 블라 아사나’ ‘블라디 블라 아사나’ 라는 외계어 같은 말에 몸을 척척 움직이는 다른 사람들이 신기했고, 동작 흉내 내기조차 안 되는 날 보며 또 한숨을 쉬곤 했다. 한 동작을 오래 유지하는 하타 수업에서는 한 동작을 15분씩 시킬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너무 힘들어서 그냥 창피함을 무릎 쓰고 요가 매트를 접고 나와 집에서 맥주나 마시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랬던 내가 그 힘들던 아쉬탕가와 하타를 연달아 들을 수 있을 만큼 체력이 길러졌다고 생각하니 새삼 뿌듯한 마음으로 수업에 들어갔다.


H쌤은 ‘다운 독’ 자세마저도 ‘아도무카스바나사나’로 이야기할 만큼, 모든 아사나를 산스크리트어로 이야기하는 유일한 선생님이다. 처음에는 쉽게 얘기할 수도 있는데 왜 굳이 저렇게 어렵게 할까 싶었는데, 이제는 덕분에 아사나의 이름들이 조금씩 귀에 꽂히는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다. 오늘도 ‘사마스띠티히’로 수련이 시작되었다. 마지막 수업이라서 그런지 선생님은 아쉬탕가부터 하타 수업까지 그야말로 달렸고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일 아침에는 아마 허벅지가 불타 사라져있지 않을까 걱정될 지경이다. 하지만 오늘 오랜만에 ‘우르드바파드마사나’ 동작을 했는데, 늘 모가지가 부러질 것 같아 무서워서 무릎에서 손을 떼지 못했던 그 동작이 오늘 갑자기 되는 것이다. 내적 환호가 절로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손을 뗐는데도 모가지가 부러지지 않다니, 아 너무 행복하다’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에카파다시르사아사나’도 물론 손을 떼고 합장을 하진 못했지만, 처음으로 다리가 목 뒤에 걸렸다.


(좌) 에카파다시르사아사나  (우) 우르드바파드마사나 / 사진 출처 (AshtangaYoga.info)


지금은 마치 아사나 이름을 다 아는 것처럼 적었지만, 모두 검색을 해야 적을 수 있는 게 나의 현실. 오늘 수업 끝나고 “선생님 오늘 처음으로 그 동작이 됐어요. 어깨 서기에서 가부좌 틀고 손으로 무릎 미는 동작이요” 라며 구구절절 설명했고 선생님은 “아 우르드바파드마사나”라고 했다. 아 나는 언제쯤 아사나 이름을 다 알게 될까. 하지만 어쨌거나 영영 불가능할 것 같던 동작들이 또 조금씩 찾아오고 있다. 이 벅참을 누가 좀 알아줬으면. 두 시간의 가열 찬 수련을 마치고 마지막 수업을 한 H쌤과 같이 수업을 들은 사람들 몇이 둘러 앉아 한참 수다를 떨다 집에 왔다. 선생님은 개인 수련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해 수업을 줄이는 중이라고 했다. 개인수련에 집중하기 위해서라니 으 멋있어. “선생님 수업 참 좋아했는데”라며 아쉬워하는 우리를 보며 “제 수업 제일 열심히 듣던 분들만 남았네요. 수업 안 해도 놀러 올게요”라고 했다. 마지막이라니 참 아쉬움이 남는 밤이었지만, 집에 와 샤워까지 마치고 나니 종일 스스로를 한심해했던 나는 사라지고 알 수 없는 뿌듯함이 밀려왔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확실한 행복’ ‘확실한 성공’ 같은 걸 찾아 헤맸던 것 같다. 돈은 얼마를 벌었으면 좋겠고 쉴 거면 해외라도 다녀왔으면 좋겠고 뭐 그런 누가 들어도 부러울 만한 성공, 행복.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기준들이 내가 아닌 타인의 시선, 타인의 기준이라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요가를 하면서부터는 ‘소소한 행복’ ‘소소한 성공’ 같은 것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등 뒤에서 양손 합장이 가능했을 때라든가, ‘파스치마따나사나’와 같은 전굴 자세에서 처음으로 발끝이 잡혔을 때 정말 별거 아닌 일들에 온종일 기뻤다. 누구에게도 ‘나 오늘 발가락이 잡혀서 행복해’라는 말을 하진 못했지만 말이다. 오늘도 두려워했던 ‘우르드바파드마사나’에서 모가지가 부러지지 않아서 나는 너무 행복했다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이 모든 행복은 온전히 내 안에 있는 것이다.



요즘 ‘아쉬탕가 요가의 정석’이라는 책을 머리맡에 두고 읽고 있는데 거기 이런 말이 있다. “아스테야란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소유물이나 부를 탐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일이나 생각 또는 심지어 배우지 않은 아사나에 대한 욕심까지도 포함한다. 만약에 아스테야를 수련한다면 돈을 지불하지 않고도 인생의 모든 보석을 얻을 것이다. 진정한 보석은 마음의 평화, 기쁨 그리고 궁극의 행복이다. 요가인들에 따르면 정신적인 수련과 내려놓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마음의 평화나 궁극의 기쁨만큼 큰 보석이 없다고 한다. 내려놓음이야말로 탐욕을 버릴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이다. 소유욕은 우리가 집착에 굴복할 때에만 찾아온다. 탐하지 않음이 확립되면 모든 보석을 선물 받을 것이다”


진정한 보석은 마음의 평화, 기쁨 그리고 궁극의 행복이다. 소리 내 또 읽어본다.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누군가와 비교하지도 나를 하찮게 대하지도 말자는 다짐을 한다. 오늘 수업의 마지막, 선생님은 이런 말을 했다 "수련하며 고군분투하며 달려온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듯이 자세를 취하세요" 그 말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그래. 매트 위에서 흔들리는 것도 나요, 바로 서는 것도 나요, 괴로운 것도 행복한 것도 오직 나. 매트 위에서 의지할 수 있는 것 나뿐입니다. 그러니 내일은 내일의 나를 조금 더 안아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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