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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사람 Jul 26. 2020

[쓰는 요가] 팬티가 사라졌다

요가도 좋은데 맥주도 좋은 걸 어떡하죠

사건 발생 시각. 오전 8시. 팬티가 사라졌다. 


이 모든 게 어제 마신 술 탓이다. 어제는 일 때문에 요가도 못 가고 연달아 회의와 답사를 하다가, 끝나고 한잔하자던 술이 3차까지 이어졌다. 마지막은 나의 최애, 포장마자. 살랑살랑 불어오는 밤바람에 간만에 소맥까지 마시고 기분이 좋았던 거 같은데, 문제는 기억이다. 술을 마시면 기억을 자주 잃는 나는 나름대로 기억을 잃지 않을 때까지 마셨는데, 정작 집에 와서는 애써 부여잡고 있던 정신줄을 놓은 모양이다. 남자친구랑 긴 통화를 한 기록은 있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맨몸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옷을 다 벗고 자는 술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혼자 사니까 누가 볼 일도 없는데 민망함이 몰려왔다. 술이 덜 깬 채로 어제 벗어놓은 속옷을 찾는데 이상하게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다 벗어두고 잠이 든 걸까. 그렇게 몇 시간을 속옷을 찾아 작은 방을 뒤적이다가 사라진 팬티를 방에 남겨둔 채 요가를 하러 가며 이런 죄책감이 들었다. 


그렇다, 나는 요가만큼 술을 좋아한다. 술을 많이 마시면 요가를 하러 갈 수 없으니 이제는 저절로 술이 좀 줄긴 했지만, 여전히 과음하는 날들이 있다. 요가를 좋아하는 사람이 맥주를 이렇게 좋아해도 될까. 요가원 선생님들을 보며 온화한 에너지로 ‘술 안 마셔요’ 얼굴에 써 붙이고 계시던데... 요가를 좀 더 진중하게 시작하게 되면 저절로 술을 더 줄이게 될까. 아니 요가를 하는 사람들이 무슨 종교인도 아니고 술까지 끊을 필요는 없지. 적당히만 먹자 적당히. 으휴 그 적당히가 안 되니까 그렇지. 


하지만 한동안 핫했던 ‘비어 요가’를 떠올려보자. 아직 비어 요가를 해본 적은 없지만, 어디서 주워들은 짧은 정보로는 독일에 사는 요가인이 맥주를 너무 좋아해서 맥주와 함께 하는 요가를 창시했다는 게 ‘비어 요가’라고 들었다. 이런 긍정적인 발전이 가능하다면 술을 마시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아. 하지만 그녀는 나처럼 만취할 때까지 마시는 요가를 하지는 않겠지.. 요가를 좋아하는 나와 맥주를 좋아하는 나 사이에서 자아 분열 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합리화를 하자면 어제의 술은 나의 후회들 때문이다. 요즘 스스로를 곧잘 괴롭히는 나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내버려 두지 못하고 자꾸만 후회한다. 올봄에 프로그램을 하던 중  다른 프로그램의 메인 작가 자리를 제안받았다. 소위 잘 나가는 프로그램이었고, 새 작가진을 꾸리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첫 방을 앞두고 있던 프로그램을 내팽개치고 새 프로그램으로 옮기는 게 부담이 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출연진과 피디 그대로인 상태로 작가만 바뀌는 것에 겁이 났다. 새로운 포맷으로 작가‘만’ 바뀌면, 결국 시청률이 떨어졌을 때 화살은 모두 작가에게 오겠구나. 작가가 바뀌어서 그런 거야 하고 말이다. 좋은 기회였고 하고는 싶었지만 그래서 겁이 났다. 그렇게 피디에게 명확한 답을 못 주고 우물쭈물하던 사이, 그 자리는 친한 작가 언니에게 돌아갔다. 만약 그때 그 프로그램을 한다고 했으면 지금처럼 갑자기 백수가 되진 않았을 텐데 여전히 후회가 남아있다. 왜 그때 용기를 내지 못했을까 하는.. 그리고 덕분에 알게 되었지. 


 

하지만 어제는 또 기회를 놓쳤다. 요즘 알바하듯 작게 하고 있는 프로그램의 피디와 회의 끝나고 함께 밥을 먹었다. 새 프로그램을 준비 중인 그가 말했다. “작가님 주위에 좋은 메인 작가 있으면 소개 좀 해주세요” 작가 세팅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사실 그때 “피디님 저도 프로그램 끝났는데 같이 하시죠”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뭔가 없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직 그 피디랑 친하지도 않고, 알바긴 하지만 이 프로그램에만 집중했으면 할 텐데 주접떨지 말자는 생각도. 그 찰나의 몇 초동안 머릿속에 온갖 갈등이 가능하다니, 참 인간의 신비란 끝도 없다. 아무튼 나는 주접을 떠는 대신 “네 주위에 한 번 알아볼게요”라는 말로 체면을 지키는 쪽을 택했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친한 피디에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아휴 그 말을 하지 그랬어. 그럼 같이하자고 했을 텐데” 하며 안타까워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 또 후회가 밀려왔다. 나는 왜 자꾸 기회를 놓치는 인간이 되는 것인가. 나한테 그 말을 꺼낸 것도 어쩌면 “(괄호 열고 지금 하는 프로그램이랑 이것도 같이 하실 수 있으세요 작가님? 아니면 괄호 닫고) 주위에 좋은 메인 작가 있으면 소개 좀 해주세요” 였을지도. 


그렇게 생각하니 또 술이라도 마시고 싶어졌다. 지나간 것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왜 자꾸 후회는 쌓이는 걸까. 뭐 설령 내가 같이하자고 해도 거절당했을 수 있지만, 그래봤자 몇 초의 민망함일 뿐일 텐데. 그는 신경도 안 썼을 텐데. ‘해보고 안 되면 말고’가 나는 왜 안 되는 걸까. 그런 후회들 덕분에 술을 마셨고, 아침에 일어나니 또 왜 이렇게 마셨을까 후회가 됐다. 후회를 지우기 위해 또 다른 후회를 만들다니 이 무슨 어리석은 짓이란 말인가. 이 많은 후회는 다 어디서 왔을까 술똥을 싸며 생각했다. 결국엔 또 나다. 파도를 일으킨 것도 나요, 파도에 잠기는 것도 나였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는 괴로워하는 나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래서 술이 다 깨기도 전에 요가원에 갔다. 이 정도 숙취라면 하루 더 건너뛸 만도 했지만, 토요일은 1도 빡세지 않는 이완 요가 시간이기 때문에 가서 잠이나 자고 오자라는 생각으로 수업을 들었다. 잡생각이 들 때마다 잡생각을 떨쳐내려고 선생님 리딩에 더 집중했다. 체감상 한 20분쯤 지난 것 같았는데 선생님이 “자 이제 사바아사나입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뭐라고요? 벌써 90분이 지났다고요? 말도 안 돼.. 그러다가 나 오늘 정말 찐하게 수련했나 봐. 수업이 끝나는 게 아쉬웠다. 


 

내가 요가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후회 없음’이라는 걸 오늘 깨닫게 되었다. 동작이 좀 더 잘 만들어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을 때는 있지만, 수련 내용에 대한 후회는 없으니까 말이다. 후회가 남지 않은데는 꾸준한 수련의 힘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우르드바에서 머리를 떼지도 팔을 펴지도 못했던 내가 이제는 다리를 더 펴고 가슴을 열기 시작했다. 어느 날 갑자기 하게 된 게 아니라, 매일 매일의 수련이 쌓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오직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집중하는 만큼의 성장과 만족감을 준다는 건 요가의 큰 감사함이다. 그래서인지 매트 위에 설 때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늘 진심이 된다. 어제와는 또 다른 오늘의 나를 살펴보게 된다. 동작을 잘 못 하는 나도, 동작을 잘하는 나도 있지만, 어느 쪽에도 후회는 없다. 내일은 분명 더 나은 내가 될 것을 알기에. 지금 못하는 동작이 어느 내일에는 가능해질 것이다. 수련을 더 하다 보면 매트 밖에서도 후회를 남기지 않는 마음 근육을 키울 수 있게 될까. 



선생님들은 늘 숨을 쉬라고 한다. 아사나보다 중요한 건 숨이라고 하는 그 말이 종종 매트 밖에서 더 힘이 된다. 그래 후회가 남으면 남는 대로 후회가 없으면 없는 대로 숨을 쉬자. 잡생각을 멈추고 가부좌를 튼다. 들이마시고 내쉬고 들이마시고 내쉬고 들이마시고 내-쉽니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는 나를 숨 쉬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90분의 수련 덕분에 마음은 한결 말랑해져 집에 돌아왔지만, 팬티의 행방은 아직 오리무중이다. 내가 좋아하는 ‘로맨스가 필요해’라는 드라마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헤어진 남자친구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던 여자주인공에게 친구가 눈썹을 밀어보라는 이야기를 한 것. 그럼 사라진 눈썹을 생각하느라 헤어진 남자친구 생각은 나지 않을 거라며. 오늘 잃어버린 팬티가 바로 그 눈썹이었다. 왜 프로그램을 같이하자고 말하지 못했을까 떨쳐내지 못했던 후회 대신 온종일 팬티의 행방이 궁금했다. 침대에도 세탁기에도 빨래 망에도 옷장에도 없는데 도대체 어디다 벗어두고 잠이 든 걸까. 내 후회가 다 사라질 때까지 팬티가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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