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남자 친구를 만난다고 하면, 약속이라도 한 듯 제일 먼저 물어오는 말이다. 그가 영어권이 아닌 프랑스 사람인데도 말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질문에는 대체로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너 영어 잘해?" "아니"
"그럼 그 사람이 한국말 하나?" "아니"
"그럼 너 프랑스어 해?" "아니"
"그럼 너네 어떻게 대화 해?"
그러게, 내가 생각해도 신기한 부분이다. 삼십 평생이 넘도록 토익 토플 영어 시험 한번 본적 없이, 고등학교 졸업 이후 영어를 딱 끊고 살아온 내가 외국인 남자 친구라니 말이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내 영어 실력은 말 그대로 형편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에게 언제 프랑스로 돌아가냐는 말도 묻지 못해서 "에어플레인... 웬?"이라고 대충 얼버무렸던 것 같다. 그래서 그에게 오는 연락을 처음엔 부러 피하기도 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만나서 뭐해.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에게선 계속 연락이 왔고, 어차피 며칠 뒤면 프랑스로 떠날 사람이니까 친구처럼 만나자 망설이며 나간 카페에서 나는 또 한 번 고개를 떨궈야만 했다. 그가 내게 뭘 주문했냐고 물었고 난 드립 커피라 답했을 뿐인데, 그가 "트리플 커피? 울랄라"하며 놀랬다. 그렇구나, 내 발음이 그 정도구나.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렇게 말도 안 통하는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오래 만나게 된 걸까. 그때의 나는 그가 밝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란 게 좋았다. 맑게 웃는 크고 깊은 두 눈동자를 보는 일이 좋았다. 하지만 거기까지라고 생각했다. 밝은 사람을 만나서 며칠 밝은 기운을 받았으면 된 거지, 우리는 인연이 아닐 거라고. 예정된 일정을 따라 그는 만난 지 며칠 만에 그렇게 프랑스로 떠났다.
하지만 문제는 술이었다. 술 취한 어느 날 새벽, 나는 친구들과 헤어지고 집에 돌아와 말도 안 되는 영어로 카톡을 잔뜩 보냈다. "로맨틱?" "썩세스?" "신시어리?" 따위의 메시지들. 이건 뭐 영어사전도 아니고 아는 단어와 형용사들의 나열이라니! 아침에 일어나서 이제 아주 국제적으로 주정을 부리는구나 속상해하고 있었는데,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그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고 말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은 진심인데 그걸 믿지 못하는 나에게 화가 났다고 했다. 나는 전화를 끊을 때까지도 내가 잘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다. 전화를 끊고 나선, 구글 번역기를 동원해 한국으로 온다는 말이냐고 다시 물었고, 그는 놀랐냐며 되레 웃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뭔가 엄청난 사람이 내 생에 걸어 들어오고 있구나. 마음이 쿵, 쿵, 쿵 뛰기 시작했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2016년 봄에 만나 벌써 3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남들은 그 사이 그가 한국어도 하게 되고, 내가 프랑스어도 하게 되고, 영어도 늘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니다. 여전히 그는 한국어를 못하고 나는 불어를 못하고 나의 영어는 제자리걸음이다. 여전히 우리는 영어, 불어, 한국어, 손짓 발짓, 통역기를 모두 동원해 대화를 한다. 하지만 언어가 우리 사랑의 장벽이라고 느낀 적은 한순간도 없었다. 적어도 우리에겐 마음이 먼저였다.
그와 함께 포르투갈 여행을 갔을 때 이런 일이 있었다. 리스본의 타임아웃이란 푸드마켓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출장 때문에 리스본에 왔다는 한 외국인이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자주 겪던 일처럼 우리를 신기하게 보며 어떻게 대화를 하냐고 또 한 번 물어왔다.
"그럼 한국어를 잘하나요?"라고 그에게 물었다.
"아니요"
"그럼 불어를 하나요?"라고 내게도 물었다.
"아니요"
"그럼 어떻게 대화를 하나요?"라고 물었을 때, mon amour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이요"
그날 그 한 마디가 내 마음을 얼마나 뜨겁게 했는지 아마도 그는 알지 못할 것이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세상에 내가 이렇게 달콤한 남자랑 만나고 있구나 꽹과리를 백번을 쳤던 것 같다. 그래, 로맨틱은 프랑스지! 그렇다, 우린 사랑으로 대화한다. 마주 보고 있을 때 그가 보내오는 눈빛이나 따스한 손길 같은 건 언어 그 이상이다.
사진첩을 뒤적거리다 지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언젠가 그가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공항에서 또 한 번 눈물겨운 이별을 하고 집에 돌아와 마음이 뒤숭숭할 때 그에게 이런 사진이 왔다. 중국 공항에서 경유하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보내온 사진이었다. 그가 매일 지갑에 넣고 다니는 내 사진과 맥주 한 병. 이 사진에도 통역이 필요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