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열심히 보는 드라마는 ‘멜로가 체질’이다. 이병헌 감독 특유의 말맛과 개그 코드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극 속에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게 될지 호기심을 끌기 때문이다. 7년을 사귀다 헤어진 구남친과 직장에서 다시 만난 천우희나, 전여친이 쓴 노래 가사를 듣고 아직도 마음 아파하는 안재홍. 죽은 남자 친구를 잊지 못해 그의 환영을 보는 전여빈, 도망간 남편을 두고 홀로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 스토리까지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사랑의 상처를 안고 있다. 스토리는 다를지언정 이들이 안고 있는 이별의 아픔은 우리네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얼마 전 방송에서는 드라마 작가인 천우희가 고백 씬을 쓰느라 고민하는 에피소드가 나왔다. 어떻게 해야 드라마틱하게 고백할 수 있냐가 고민의 핵심이었는데 결국엔 대단한 고백이랄 게 있냐는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사람들은 어떻게 고백을 하고 어떻게 사랑을 시작하게 되는 걸까. 드라마를 보다가 내 기억 역시 자연스레 그를 처음 만난 날로 거슬러 올라갔다.
어느 봄밤, 우린 함께 걸었지
우리가 처음 만난 건 2016년 어느 봄밤. 그날은 금요일 밤이었다. 친한 선배 언니를 만나 일로 쌓인 스트레스를 술로 풀었지만, 술기운이 오른 언니를 택시 태워 집에 보낸 후에도 난 술이 모자라다는 생각뿐이었다. 맥주 딱 한 잔만 더 마셨으면 좋겠는데.. 결국 난 집으로 가지 않고 술 생각이 날 때면 혼자서 종종 찾던 bar로 향했다. 그곳은 나 말고도 혼자 온 손님들이 꽤 찾는 곳이었고, 난 이미 친분을 튼 사장 언니 앞에 앉아 맥주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들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부터 운명의 불꽃이 일었냐고 묻는다면, 전혀. 처음에 우린 서로 눈길도 주고받지 않는 사이였다. 그날 내가 찾은 BAR는 밴드 출신 사장님이 차린 곳이라 때마다 플레이리스트를 바꿔가며 술맛 오르는 음악을 틀어주는 곳이었다. 내 기억에 남은 그의 모습은 그가 직접 플레이리스트를 바꿔가며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한 것뿐. 문장으로 적으니 마치 영화에서나 볼 법한 느낌 있는 장면처럼 느껴지지만, 정작 내 기억엔 웬 외국인이 혼자 와서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틀더니 막춤을 추네? 정도였다.
난 적당히 취기도 올랐겠다 남들에겐 관심 끈 채 혼자서 맥주를 두어 잔 더 마시고 난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집에 가려고 BAR에서 나왔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그곳엔 그가 서 있었다. “집까지 바래다줄게요” 그게 그의 첫 마디였다. 갑작스러운 영어를 듣고 밤늦게까지 마신 술이 식도를 타고 넘어올 것 같았다. 아니 안에서는 말 한마디 눈빛 한 번 주고받지 않은 사이인데 갑자기 나를 바래다주겠다고?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평소 친분이 있던 사장 언니가 늦은 시간 내가 혼자 집에 가는 게 걱정이 돼 그에게 바래다주었다고 한 것이었다. 밤늦은 시간 외국인이 따라오는 게 더 무서웠지만, 대화를 나누고 싶다며 싱긋 웃는 그의 얼굴을 보니 적어도 나쁜 사람은 아니구나 이유 없는 직감이 들었다. 그게 우리의 시작이었다.
"집까지 바래다줄게요" 그건 고백이었을까.
생각해보면 화려한 고백도 화려하지 않은 고백도 없었다. 그냥 그렇게 같이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린 함께가 된 것 같다.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그땐 그저 이창동을 좋아한다는 프랑스 남자가 신기했다. 그리고 우린 서로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 둘, 하루 이틀 쌓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금이 되었다. 만약 그날 우리가 같은 길을 걷지 않았더라도 지금처럼 연인이 될 수 있었을까. 그가 곁에 있는 게 당연하게 느껴지던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서로 혼자서 BAR를 간 것도, 사장 언니가 대신 바래다주라고 한 것도, 아무것도 아닌 그 날의 퍼즐들이 이제야 운명처럼 느껴진 것이다.
그날의 우린 드라마 제목처럼 ‘멜로가 체질’인 날들이었을까. 오히려 그 시기의 나를 돌아보면 연애에 잔뜩 날이 서 있을 때였다. 나쁜 사람을 만났고 아픈 상처가 오래갔고, 그래서 부러 나쁜 년이 되기도 했던 엉망인 날들이었다. 만일 우리가 만났을 때 그가 뭔가 대단한 고백을 했다면 난 아마 또 도망갔을 것이다. 어영부영 망설이다가 어느새 내 옆에 서 있는 그를 눈치챘을 땐, 내내 그늘진 마음에 따스한 볕이 이미 너무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오늘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 프랑스 낭트로 여행을 간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요즘 ‘일하기 싫어 병’에 걸린 탓에 잔뜩 맥 빠진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는데, 그는 낭트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알려주며 다음엔 함께 오자고 했다. 그곳은 너무 아름답지만 내가 없어서 뭔가를 놓친 것 같은 기분이라고 말이다. 그는 모든 게 내가 함께 있어야 완벽해진다고 했다. 망설임 없이 다정한 말에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뱉고 말았다. 이렇게 황홀한 고백이 있을까.
일상으로의 초대
그리고 잊고 있었던 나의 고백 판타지가 생각났다. 어렸을 때부터 난 누군가에게 고백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내가 먼저 멋있게 고백해야지 하는 다짐이 있었는데, 정작 한 번도 해본 적은 없다. 다만 그런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속에서 먼저 울리는 음악이 있다. 바로 신해철의 ‘일상으로의 초대’이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서로의 일상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평범한 나의 일상에 누군가가 더해졌을 때, 달라지는 삶의 모든 파동이 사랑이 아닐까. 가보지도 못한 낭트를 함께 걷는 상상을 하며 그 아름다운 가사를 음미해본다.
내게로 와줘. 내 생활 속으로 너와 함께라면 모든 게 새로울 거야 매일 똑같은 일상이지만 너와 함께라면 모든 게 달라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