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일 년에 네 번이나 바뀌는 계절인데, 유독 계절이 바뀌는 게 싫어지고 마음은 내 뜻대로 안 되고 모든 걸 계절 탓으로 돌리고 싶은 날들이다. 그리고 난 요즘 곧잘 외로움에 빠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닿지 않는 거리에 있다는 건 이런 날들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퇴근을 하고 지친 밤이면 함께 맥주 한잔 마시며 수다를 떨고 싶고 오래간만에 시간이 나는 주말엔 당신이 곁에 있어서 어딘가 함께 떠나며 일상을 잊고도 싶다. 하지만 난 서울에서, 그는 파리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닌 혼자다. 각자가 이겨내야 할 외로움의 몫이 있다. 그리고 요 며칠 난 그 외로움이 조금 버겁다.
오늘은 오래간만에 혼자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이 유난히 쓸쓸하게 느껴졌다. 영화를 보는 동안 와 있던 그의 부재중 전화를 보고 전화를 걸었지만, 전처럼 밝은 목소리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시시콜콜 털어놓고 싶은 마음을 모른 채, 그는 내가 아직 밥을 안 먹었다는 말에 저녁을 먹어야 한다며 삼계탕 치킨 태국 음식 등등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신나게 추천했지만, 정작 난 배는 고파도 먹고 싶은 음식이 없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그래서 요즘엔 자주 술에 의존한다. 그는 먹고 싶은 게 없어도 잘 챙겨 먹어야 한다며, 세 시간 뒤에 전화해서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 물어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난 돌아오는 길에 밥 대신 와인을 한 병 샀다. 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채고 '우린 함께 있어야 더 좋아'라고 말하는 그였지만, 지금 당장 우린 함께 있을 수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난 보고 싶다는 말을 보고 싶을 때마다 할 수 없다. 왜냐면 그건 외롭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니까.
당신을 만나고부터 100 같은 10이 있다
내겐 당신을 만나고부터 100 같은 10이 있다. 당신과 함께여서 행복한 게 90, 외로운 게 10이라면, 분명 행복한 게 90인데 100 같은 10이 있다. 외로운 나는 그래서 요즘 위험한 상상을 하곤 한다. 만약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같은 생각 말이다. 그냥 평범하게, 한국 남자, 같은 도시에 사는 사람을 만나서 외로울 땐 서로를 달래주고 기쁜 일엔 함께 축하하며 그 모든 걸 때때로 얼굴 보며 할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면 이 외로움이 조금 달라졌을까. 그래서 우리 연애의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곤 한다. 앞으로 몇 년이 지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그때도 함께일 수 있을까.
사람들은 쉽게 결혼을 얘기한다. "그냥 결혼 해" 하고 말이다. 하지만 결혼을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근본적인 문제는 너무 어렵다. 아마 우리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누군가 한쪽은 지금 살고 있는 나라와 가족을 떠나야만 할 테니 말이다. 직장도 잃게 될 테고,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서 한 사람만을 믿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일. 감히 그걸 '그냥 결혼'이라는 말로 용기 낼 수 있을까. 파리에 있는 그에게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빠가 있고, 내겐 아빠 없이 혼자 늙어가는 엄마가 있다. 우리의 미래엔 선택지가 너무 버거워서 난 그 미래를 꿈꾸는 걸 자꾸 미루는 것 같다. 그래서 이런 외로움을 그에게 한 번도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 힘들다고 이야기를 해도,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나만 참으면 되니까, 그래서 나만 참으면서 오늘도 와인을 마신다.
가까운 친구들은 우리의 연애가 워킹 타이틀 영화를 보는 것 같다고 했고, 잘 모르는 낯선 타인들은 우리를 만나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커플이라며 추켜세우기 바쁘다. 파리에서 서울이라는 장거리 연애를 유지한다는 것, 물론 그건 사람들이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우리의 연애가 핑크빛만은 아니다. 언젠가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은 적이 있다. 일 년에 몇 달씩 겨우 보면서 이어지는 연애가 평범한 걸까. 내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그때 친구는 답을 하지 않았다. 몇 달이나 오랜 시간이 지나 "네가 그때 그런 이야기를 했을 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라고 답했다. 평소에도 속마음을 잘 털어놓는 편은 아니지만, 마음을 털어놓는 일이 누군가에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로 난 그냥 친구들이 원하는 워킹 타이틀의 한 여주인공처럼 보이기로 선택했다.
술을 마시고 싶진 않지만, 외롭다고 털어놓을 곳은 없고, 내가 힘든 것 때문에 그가 힘든 건 싫고, 그래서 또 술을 마신다. 그리고 술을 마실 때마다 요즘엔 부쩍 이런 생각을 한다. 만약 우리가 헤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도 지난 어느 연애처럼 서로에게 상처를 내지 못해 안달 내는 그런 바보 같은 이별을 하게 될까. 영화 속 어느 장면처럼 헤어진 지 실감도 안 난 채 평범한 일상을 보내다가 한참이 지나 울컥 무너져 내리는 날들을 보내게 될까. 할리우드 탑스타들처럼 서로의 새로운 연인을 소개해주는 친구가 될까. 그리고 정말 우리도 정말 헤어지는 날이 올까.
어느덧 서른 중반. 몇 번의 연애와 몇 번의 사랑과 몇 번의 이별이 내게 남긴 건, 이별에 대한 두려움인 것 같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이별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하고 있는 날 발견했다. 헤어지고도 괜찮을까, 하나씩 마음을 점검하면서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은 모르겠다. 당신이랑 헤어지고도 괜찮을지. 당신 같은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생각을 하면, 단언컨대 없을 것 같아서 겁이 난다.
그는 약속을 참 잘 지키는 사람이다. 내일 어딜 다녀오면 전화할게 라고 하면 꼭 그 시간에 전화를 하고, 혼자 떠난 여행지가 너무 좋아서 '다음엔 꼭 같이 가자'라는 말을 하면 시간이 지난 어느 날엔 정말 비행기 티켓 예약을 하고 있는 그런 사람이다. 오늘도 저녁은 뭘 먹었는지 다시 전화해 물어보겠다던 그는 약속대로 세 시간이 지나서 다시 전화를 해왔다. "3시간이 지나서 전화했어. 너랑 한 약속이니까 정말 중요한 거니까"라고 말이다. 난 꼭 밥을 먹겠다고 했지만, 밥 대신 와인을 마시고 있다는 하고야 말았다. 전화를 받기 전엔 힘들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아야지 했지만, 정작 내가 밥을 챙겨 먹었다는 말에 금세 밝아진 그의 목소리에 울컥 일렁이는 마음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이터널 선샤인"이란 영화에서는 이별의 아픔을 견디지 못해 기억을 지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반대로 난 요즘 기억을 지우는 대신 외로움을 지울 순 없을까 생각한다. 보고 싶어도 외로워지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 흘려한 말이라도 늘 그렇듯 잊지 않고 제시간에 온 그의 전화를 받으며,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서, 나는 자꾸 더 외로워진다. 엄지 손가락 걸듯 사랑을 약속으로 묶어둘 순 없겠지만, 우리에겐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이별 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