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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달 모나 Monah thedal Dec 23. 2023

폐허가 되고 또 폐허가 되어도 살아갈 수밖에 없는

<모래 도시>, ‘책방 오늘’에서 우연히 만난

<모래 도시>, 허수경 시인의 소설, ‘책방 오늘’에서 우연히 만난


나는 지금 날짜변경선을 넘어 다른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다른 시간 속으로 기필코 들어갈 것이다. 오랫동안 모래도시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p.71)

우리는 나아질 수 없는 내일 때문에 울었던 게 아니었다. 내일이면 다시 유프라테스에서 해가 떠오른다고 해도 오늘 우리들의 상처는 지울 수 없는 것이었다. 노예로 증명된 오늘이 우리에겐 상처였다.
(p.114)

그녀는 도대체 어디에서 저런 사무친 얼굴을 가지게 되었는가. 너의 시간, 내가 너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너의 지나온 시간을 해독할 수 있겠는가. 사나운 가시에 긁힌 듯 쓰라려 침을 한번 삼켰다.    
(p.142)

“너한테는 떠돌이 냄새가 나서 말이야. 떠돌이들이 발굴장에 들어오는 걸 싫어하거든. 내가 하는 발굴은 말이야. 떠돌이들이 흔히 생각하듯, 폐허를 드러내는 작업이 아니거든. 땅속에 스며들어 있는 삶들의 층을 찾아내는 거거든. 폐허가 되고 또 폐허가 되어도 사는 거 말이야. 폐허가 되고 또 되어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 말이야.”   
(p.147)

- 허수경, <모래도시> 중 발췌


우연히 만난 책들. 시리즈의 제목에 이만큼 충실한 서평도 처음입니다. <모래도시>는 ‘책방 오늘’에서 만난 블라인드북이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우연히’ 마주할 수밖에 없는 책이었죠.      


낯선 곳으로 떠나온 자들의 이야기가 담긴, 시인의 소설.     


책방의 글귀는 책을 그렇게 설명했습니다. 시인의 소설. 그 간결한 두 단어는 저를 책으로 이끌었죠. 좋은 책이라면 장르나 주제에 제한을 두지 않고 읽는 편이지만, 굳이 선호하는 취향을 밝히자면 저는 시 같은 소설을 좋아합니다. 선명하게 인과관계를 밝히며 진행되는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암호 해독하듯 파헤쳐 나가는 책은 또 그만의 재미가 있거든요. 간결한 문장과 짧은 호흡으로 흐르는 시적인 매력, 은유와 상징이 지니는 힘은 명료한 산문만큼이나 힘이 있으니까요.     


그렇게 펼쳐 든 첫 장. 책을 읽으며 전 조금 당황했습니다. 책의 문장은 생각보다 훨씬 길었고, 예상만큼 ‘시적’으로 신비롭지 않았거든요. 시인의 소설이라는 표현에 너무 집착했던 까닭일까요. 느리고 긴 호흡으로 진행되는 문장과 독백들 앞에서 잠시 혼란스러워졌습니다.      


<모래도시>는 회상이라는 장치에 기대어 진행되는 소설입니다. 현재와 과거를 아무런 예고 없이 오가고, 가끔은 화자의 의식이 흘러가는 대로 사건이 나열됩니다. 다중인칭에 시점변화도 매우 빈번해서 자칫하면 이야기 속에서 길을 잃기 십상이죠. 잠시라도 정신을 놓치면 이야기가 갈림길 저편으로 홀로 걸어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서사의 얼개를 정확히 꿰맞추기 위해서는 열과 성을 다해 모든 문장을 읽어야 합니다. 마치 시를 읽을 때처럼 한 글자씩 꾹꾹 눌러서 의미를 해석해야 하죠. 시인의 소설이란 그런 의미였습니다. 소설이 시처럼 간결하게 끊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시를 읽을 때처럼 스치는 단어 하나에도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었던 거죠. 상당히 낯선 방식의 독법이었지만, 그도 읽다 보니 적응이 되더군요. 그리고 익숙해질 때쯤에 알게 되었습니다. 작가가 ‘회상’이라는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모래도시>는 할퀴어지고 짓이겨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작은 바람에도 나부끼는 모래알처럼, 끊임없이 풍화되고 조각나면서도 마지막 남은 몇몇 가지를 그러쥐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죠.      


슈테판, 파델, 그리고 ‘나’는 모두 자신이 뿌리를 내렸던 곳에서 떠밀리듯 타지로 향한 이들입니다. 독일인인 슈테판은 갑갑한 바닷가 마을에서 탈출하고자, 한국인인 ‘나’는 생활고로 얼룩지고 속 시끄러웠던 고국의 생활에서 도망치고자, 레바논 사람인 파델은 고국의 내전을 피해, 그리고 자신의 꿈을 위해, 독일의 ㅁ시에서 고고학을 공부하게 되죠. ㅁ시에 도달한 각자의 과정과 목적은 달랐지만, 셋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셋은 모두 무언가를 고향에 두고 왔고, 그 ‘무언가’에는 사랑하는 이들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이죠. 회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 역시 가족을 비롯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거듭된 회상은 그들의 내적 갈등의 표상입니다. 주인공들이 걸어온 여태의 삶은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고고학 공부를 핑계로 ㅁ시에 머무를 만큼요. 하지만 모든 걸 버리고 떠나와야 할 만큼 극도의 절박한 이유도 없었습니다. 각자가 살았던 ‘모래도시’를 떠나기로 결심한 건, 순전히 그들의 선택이었죠.      


그래서 주인공들은 회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갈등합니다. 도망치거나 떠나온 자신들과 달리, 남은 이들은 순탄치 않은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거든요. 그중 몇몇은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마저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끝까지 주어진 삶에 순응한 것이죠. (물론, 그중 어떤 이들에게는 죽음이 또 다른 도피처였지만요.)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둘 중 무엇이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선택의 갈림길이 떠오를 때마다 주인공들을 괴로워합니다. 사랑하는 이들 곁에 남아 그들을 끝까지 지켰어야 한다는 원초적인 의무감과 자기 자신을 지키고 싶은 또 다른 근원의 이기심, 자애(自愛)의 마음이 끝없는 내면의 갈등을 일으킵니다. 모순된 두 마음은 결국 사무치는 외로움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리움이 되어 마음속에 묵직하게 납덩이처럼 들어앉게 되죠.     


작가가 ‘회상’이라는 장치를 굳이 사용한 것은. 독해가 힘들 정도의 긴 문장들과 혼란한 구성을 구태여 고집한 것은. 아마도 이런 어려운 마음을 글로 표현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만약 <모래도시>가 흔하디흔한 소설처럼 기승전결이 완벽하게 짜여 있었더라면, 아마도 독자는 주인공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유랑을 택한 그들을, 덧없는 환상만 좇는 한심스러운 이들로 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강압이 아닌 자의로, 절박한 이유 없이 외따로 걷는 길을 택한 이들을, 타인의 눈이 대체 얼마만큼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들의 입장이 되어 보기 전까지, 우리는 결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회상인 거지요. 회상이어야만 했던 거지요. 그들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던 겁니다. 흩어지고, 흩어졌고, 끝끝내 흩어질 수밖에 없었던 그들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     


<모래도시>는 흩뿌려진 모래알처럼, 마음이 산산이 조각나 버린 날에 읽기 좋은 책입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매 페이지마다 부서지는 나의 손을 부여잡고, 함께 부서지는 감각에 공감해 주거든요. 이야기 속 그도, 나처럼 한없이 부서지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한참을 부서지다 보면 이상하게도 호되었던 마음의 일렁임이 잦아듭니다. 현실이 모래도시라는 점은 변함이 없지만, 모래알도 이 땅을 일구는 또 하나의 삶의 방식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 있게 되거든요. 한바탕 터진 울음 뒤에는 개운함이 찾아오듯, 수없는 모래알 중 하나로 사는 삶도 그럭저럭 괜찮다는 사실을, 마침내 수용할 수 있게 된달까요.     


머리로 해독하는 글이 아닌,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비로소 이해되는 글.

<모래도시>는 끝까지 시인의 소설이었습니다.      



추신

: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을 덧붙이자면, 블라인드북의 포장지를 여는 순간 무척 놀랐습니다. <모래도시>가 이번에 새로 나온 제 책, <오로라 이엘로> 너무나도 비슷했거든요. 표지의 테마 색상인 검정과 보라색부터 실루엣을 모티브로 한 디자인, 페이지 수가 260쪽 남짓하다는 사실까지. 두 책은 판형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몹시 흡사했습니다. ‘책방 오늘’에 방문하기 전에 제 책이 세상에 나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저조차도 제 책을 보며 ‘<모래도시>를 본따서 책을 만든 것 아닌가’라며 의심했을 겁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책이 올바른 사람에게 온 것 같습니다. 블라인드북임에도 제 책과 유사한 모양의 책이 나왔다는 건, 결국 제 취향에 맞는 책을 골랐다는 의미니까요.     



이 책을 우연히 만날 수 있었던 이유


책방 오늘




< 우연히 만난 책들 >


책방 여행을 다니고 있습니다.

책방을 방문할 때마다 공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책을 한 권씩 구매합니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책들을 그냥 묵혀 두기 아까워 책에 대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 우연히 만난 책들 >은 그렇게 탄생하게 된 글 모음집입니다.

글에서는 책방에서 책을 고른 이유와 책에 대한 소소한 감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달 모나 Monah thed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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