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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달 모나 Monah thedal Jan 06. 2024

이제 알겠어? 우리는 누군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아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다정한 책방’에서 우연히 만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다정한 책방’에서 우연히 만난


“이제 알겠어? 우리는 둘 다 누군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아.”  (p.696)     

나는 밤공기를 가슴 가득 들이키고 알맞은 언어와 적절한 표현을 찾는다. 그리고 말한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그림자를 데리고 살았어.” (p.53)

나는 그저 이 현실이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낄 뿐이다. 이 장소의 공기가 내 호흡기에 맞지 않는다, 라고 바꿔 말해도 될 정도로. (p.228)

매일의 혹독한 추위는 내게 색다르고 기분 좋은 자극이었다. 지금까지 알던 것과 ‘성분이 다른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신선한 감촉이 느껴졌다. 어찌 됐건 내 인생의 자리가 바뀐 것이다. 바뀐 환경이 앞으로 나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지 당장은 확실하지 않을지언정. (p.330)

소년은 이 현실 세계와 마음이 이어져 있지 않다. 이 세계에 진정한 의미로는 뿌리내리지 않은 것이다. 임시로 매어 둔 ‘기구’ 같은 존재. 지상에서 살짝 떠오른 상태로 살고 있다. (p.535)    

안경을 고쳐 쓸 때마다 조금씩 전과 다른 인간이 되어가는 듯 보였다. 바꿔 말해, 그는 시시각각 성장을 거듭하는지도 모른다. (p.760)

요컨대 진실이란 것은 일정한 어떤 정지 속이 아니라, 부단히 이행하는 형체 안에 있다. 그게 이야기라는 것의 진수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다. (p.767)

- 무라카미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중 발췌



※ 해당 서평은 내용 요약 등 기타 사족을 전부 제거하고,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만을 담은 글입니다. 더불어 소설의 예기치 않은 스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다 읽으신 분만 아래 서평을 읽기를 추천합니다. (제발제발요.)     


그럼, 경고 문구는 이 정도로 충분한 거 같으니, 이제 거두절미하고 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통해 하루키는 ‘생(生)’을 그려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소설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을 그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자아’를 중심으로 본다면 생의 주기는 비교적 단순합니다. 이상의 나를 꿈꾸고, 현실의 나를 인지하고, 좌절하고, 가끔은 도피하고, 그러다 결국 ‘진정한 나’, 가감 없는 ‘나’의 모습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죠. (이 과정이 매끄럽지 않거나 후퇴할 때 정신적인 고통이나 질환을 얻기도 하고요.) 그렇게 ‘나’를 받아들인 후에는 사회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나의 진정한 모습을 품었으니, 세상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아마도 그게 사회의 일원이 되어 가는 과정일 겁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이런 자아의 생의 주기, 성장의 과정을
단계적으로, 착실히, 일궈 나가는 소설입니다.


소설은 ‘나’와 ‘소녀’의 만남으로 시작합니다. 열일곱과 열여섯인 둘은 각자의 이상을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둘 중 누구도 ‘진짜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으로는 살고 있지 않죠. 그래서 소녀는 ‘진짜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새로운 도시를 창조합니다. 그곳은 ‘이상의 공간’입니다. 청소년기에 접어들며, 서서히 깨닫기 시작하는 ‘사회 속의 나’라는 이미지와 달리,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나’의 모습으로 평생 존재할 수 있는 곳이죠. 바닷물(세상의 평가)이 세차게 들이치는 현실과 달리, ‘그 도시’에서는 온전한 ‘나’로 존재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나’는 그런 소녀의 세계를 착실하게 받아 적습니다. 소녀가 창조한 세상의 골조에 살을 덧대 붙이기까지 하지요. 그렇게 둘은 그렇게 진정한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상의 공간’을 함께 만들어 냅니다. 나는 끝까지 그 도시를 ‘소녀’가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도시를 현실화시킨 것은 소녀가 아닌 ‘나’입니다. 소녀에게 도시란 말뿐인 상상이자 은유였지만, 그걸 받아 적고 가슴 깊이 믿으며, 오래도록 간직한 건 결국 나였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의식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열일곱에서 마흔이 될 때까지, ‘소녀’는 나를 지탱하는 무언가가 되죠. 소녀의 소식이 끊긴 후에도, 다른 여자를 만나고 연애를 해도, 나는 중년의 나이까지 소녀를 잊지 못합니다. 그녀가 만든 (것처럼 느껴지는) 그 ‘도시’라는 이상의 세계와 그곳에 가면 이룰 수 있는, ‘이상적인 나’의 모습도 함께요.      


그리고 중년이 된 어느 시점, 나는 ‘도시’에 들어가게 됩니다. 소설에서는 자세히 묘사하지 않지만, 저는 아마 ‘내’가 도시로 들어가게 되는 시점이 ‘소녀’를 포기하는 시점과 어느 정도 맞물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소녀’가 아닌 ‘이상으로서의 나’를 포기하는 시점과 맞닿아 있을 테죠. ‘나’는 열일곱부터 중년이 될 때까지, ‘소녀’에 기대어 살아왔습니다. 어는 누구 하나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이 세상에서, ‘소녀’는 유일하게 나를 완전하게 만들어 주는 존재였으니까요. 하지만 중년의 어느 시점, ‘나’는 여태까지 붙들어 오던 ‘소녀’라는 끈을, 이제는 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소녀’로 대변되는 청년 시절의 환상은 단지 환상일 뿐이라는 걸,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깨닫게 된 거죠.      


그 인지의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겁니다. 오랫동안 품었던 사랑과 이상이 단지 허망한 꿈에 불과하다는 걸 한순간에 인정하기란 쉽지 않죠. 그래서 ‘나’는 ‘도시’로 들어가게 됩니다. 소설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떨어졌다고 했지만, 사실은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는, 어떤 철저한 논리에 의해 벌어진 일일 겁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상황에서는 잠깐이라도 어딘가로 도피하는 것이 도움이 되거든요. (의식적이든, 그렇지 않든요.) 그렇게 도망친 도시(세계)에서 삶을 지속하던 중, ‘나’에게는 첫 번째 선택지가 주어집니다. ‘도피 생활을 그만둘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라는 양자택일의 질문. ‘나’는 치열한 고민 끝에 결국 도시에 머무르기로 합니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도피 생활을 계속하기로 한 것이죠. 그렇게 소설의 1부는 끝납니다.      


하지만 2부의 시작에서 어찌 된 일인지 나는 다시 현재로 돌아와 있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가 전개되죠. 현실로 되돌아온 나는 여러 변화를 꾀합니다. 여태껏 큰 문제를 일으키진 않았지만, 내내 몸에 맞지 않다고 느꼈던 회사 생활을 정리하고, 후쿠시마현의 한 마을 도서관으로 이직하죠. 느닷없이 끝나 버린 정신적인 도피 생활과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현실에 어떻게든 다시 적응하기 위해서요. 작은 도서관의 관장으로 생활하며, 나는 점차 현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고야스 씨’와 ‘옐로 서브마린 소년’, 그리고 ‘소에다 씨’를 만나게 되죠. 그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나’의 현실 착륙을 돕습니다.      


‘소에다 씨’는 도서관 직원으로 현실에 발을 단단하게 붙이고 사는 사람입니다. 생활력이 넘치는 사서이자, 직업인이자, 한 남자의 부인이기도 하죠. 이상적인 삶만 꿈꾸었던 ‘나’와 정반대인 그녀는 나에게 큰 귀감이 됩니다. 물론, 누군가는 소에다 씨를 조력자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소에다 씨야말로 ‘내’가 진정으로 존경하는 대상이 아닐까 합니다. 그녀는 이상과 현실을 굳이 분리하려 하지 않고, 현실 속에서 충분한 가치를 찾을 줄 알거든요. (누구와는 다르게요.)     


그리고 ‘고야스 씨’가 있습니다. 고야스 씨는 ‘이상적인 삶’이 붕괴해 버렸지만 그래도 무너지지 않고 나름의 방식으로 그 험난한 시간을 견뎌낸 인물입니다. 그는 ‘내’가 가장 본받고 싶은 대상입니다. 소에다 씨와는 다른 방식의 생활력으로, 세상을 헤쳐 나가는 방법을 알고 있거든요. 그의 도움으로, 나는 모든 것이 무너진 삶에 새로운 이정표를 하나씩 세워 갑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평온을 되찾게 되죠. 전과는 달리, 안정된 마음으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용기를 얻습니다. ‘고야스 씨’는 어느새 ‘소녀’를 대체하는,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마음의 기둥이 됩니다. 하지만 그도 소녀처럼, 영원히 나를 지탱하지는 못하죠. 하지만 괜찮습니다. 도서관에는 고야스 씨 외에도 나를 지속할 수 있게 하는, 또 다른 인물이 존재하거든요.      


나를 지탱하는 또 하나의 기둥은, ‘옐로 서브마린 요트파카’를 늘상 입고 다니는, ‘옐로 서브마린 소년’입니다. 소년은 나의 청소년기를 되풀이하는 인물입니다. 사람과 거리를 두고, 관계 맺는 것에 서투르며, 책만 읽었던 열일곱의 자신을, 그대로 재현하는 아이죠. (물론, ‘나’와 옐로 서브마린 소년의 증상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요.) ‘나’는 자신과 똑 닮은 아이를 지켜보며, 제 3자의 시선에서 진정한 나의 모습을 복기할 기회를 얻습니다. 이상의 세계에서 그렸던 자신이 아닌, 진짜 현실 세계에서의 자신을요. 그리고 2부의 끝에서 ‘나’는 옐로 서브마린 소년을 도우며, 어떤 편견의 색안경 없이 그를 그 자체로서 이해하며, 진실된 자신의 모습을, 마침내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게 기나긴 과정을 거쳐 도착한 3부. 그 ‘도시’에 머물렀던 ‘나’의 이야기가 다시 전개됩니다. 그곳에서 ‘나’는 다시 한번, 질문을 받습니다. ‘이 도시에 남을 것인지, 혹은 떠날 것인지’. 달리 말하자면, ‘이상의 세계만을 꿈꾸는, 정신적인 도피 생활을 계속할 것인지, 혹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진정한 나로서 살아갈 것인지’. 이번에 내게 질문하는 건 ‘옐로 서브마린 요트파카’ 소년입니다. (‘그 도시’에 도착해서 ‘감정’과 ‘사회적 교류’라는, 현실의 결핍을 채우는 방법을 마침내 학습하게 된 소년.) 나와 똑 닮은, 나를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 또 다른 의미의 진정한 ‘나’.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나’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나는,     

 


글쎄요.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작가가 마지막을 공백으로 남겨 놓아 독자는 ‘나’의 선택을 끝까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상상해 볼 수는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저 또한 끝까지 ‘나’의 선택이 어땠을지를 적지 않으렵니다. 작가가 남긴 의도를, 이번만큼은 따라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러니 결말에 대한 제 생각을 적는 대신, 책 속의 한 구절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2부의 끝에서 ‘나’는 잠시 소녀와 재회하게 됩니다. 꿈인지 환상인지, 알 수 없는 풍경 속에서 다시 만난 소녀는 내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알겠어? 우리는 둘 다 누군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아.  



우리는 둘 다 누군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아.

그림자라는 말. 참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죠. 단어의 해독 방법은 무한할 테지만, 전 이 구절에서의 ‘그림자’를 두 가지로 해석해 보려 합니다.     


첫째는 ‘존재로서의 그림자’입니다. 이 드넓은 세상 속 우리는 누군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상이 얼마나 높든, 꿈이 얼마나 크든, 결국 우리 중 진정으로 빛나는 건 오직 몇몇일 뿐이죠. 달리 말하자면, 그 몇몇을 제외한 우리는 모두 그림자일 뿐입니다. ‘생의 주기’를 통해서, 몇 번의 도피와 고통과 성장을 통하여, 우리는 그 사실을 마침내 깨닫게 되죠.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점차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게 되는 거고요.


둘째는 ‘그림자와 교체된 시간’입니다. 그 도시로 도피했던 ‘나’처럼, 우리에게는 가끔 그림자와 본체의 자리를 맞바꾸어 살아가야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물론, 진짜 그림자와 본체를 맞바꾼다는 건 아닙니다. 마치 그림자가 대신해서 살아가는 것처럼, 경직되고 기계적인 모습으로 일상을 이어간다는 뜻이죠. 그렇게 껍질뿐인 그림자가 일상을 살아내는 동안, 내면에 있는 본체는 치열하게 고민하고 또 고통스러워합니다. 진정한 자신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진지하게 탐구하면서요. 그러던 중 ‘나’처럼 잠시 어디론가 훌쩍 떠나기도 하죠. (훌쩍 떠나는 것 또한 고민의 과정이니까요.) 그렇게 본체가 갈등의 시기를 겪는 동안 그림자는 착실하게 그의 자리를 대체합니다. 껍데기뿐인 모습이지만, 괜찮습니다. 그림자의 노력이 있었기에, 본체는 고난의 시간 끝에도 여전히 돌아갈 곳이 있거든요. ‘내’가 ‘그 도시’에서 나갈 수 있었던 이유가 지상에 있었던 ‘나의 그림자’ 덕분인 것처럼요. 겉보기에는 껍데기뿐인 시기였을지는 몰라도, 그림자는 그 시간 동안 나를 대행하며, 내가 ‘나’로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자격을 마지막까지 지켜준 것이죠. 만약 ‘내’가 다시 돌아가기를 선택했다면, ‘나’는 그림자와 다시 만나며 완전한 모습의 ‘나’를 탄생시켰을 겁니다. 그렇게 재탄생한 ‘나’는 열병을 겪기 전의 ‘나’보다 훨씬 성숙해져 있겠죠.      


그림자와 교체된 시간은 누구에게나 발생합니다. 감기에 걸리는 것처럼,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죠. ‘그 도시’로의 도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내면의 세계와 현실을 적절히 오가는 시기가 있어야지만,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성장을 거듭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설사 ‘내’가 다시 현실로 돌아오지 않더라도, 현실에서는 영원히 그림자의 모습으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대로 괜찮지 않을까 합니다. 무책임한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진심입니다. 겉껍질이 그림자면 어떤가요. 내면의 본체가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면 어떤가요. 어찌 되었든 ‘나’라는 존재는 절반은 평안하고, 절반은 의무적인 모습으로 살아갈 것 아닌가요?      



그리고 우리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지 않던가요?           



생(生)과 산다는 것의 의미를 되짚게 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면밀하게 그려내는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었습니다.




이 책을 우연히 만날 수 있었던 이유


다정한 책방




< 우연히 만난 책들 >


책방 여행을 다니고 있습니다.

책방을 방문할 때마다 공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책을 한 권씩 구매합니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책들을 그냥 묵혀 두기 아까워 책에 대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 우연히 만난 책들 >은 그렇게 탄생하게 된 글 모음집입니다.

글에서는 책방에서 책을 고른 이유와 책에 대한 소소한 감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달 모나 Monah thed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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