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달 모나 Monah thedal Feb 17. 2024

감탄이 아픔을 동반하면 나는 그 창작자와 사랑에 빠진다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희정서재’에 작정하고 들고 간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최혜진, ‘희정서재’에 작정하고 들고 간


관찰력은 보는 대상에 감정이입을 하거나 감탄할 줄 아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감탄하는 마음이 관찰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p.27.)     

어른이 된 이후의 감탄은 결심에서 나옵니다. 나는 이제부터 여기 앉아서 구름을 보겠다. 늘상 보던 구름이지만 저겻이 흥미롭게 느껴질 때까지 앉아서 바라보겠다고 결심하면 됩니다. (p.111)     

아이들은 모두 시인으로 태어납니다. 아이의 시선에서 배우세요. 성과주의의 논리가 통하지 않는 세계가 거기에 있습니다. (p.208)    

‘내가 무얼 해줘서 아이를 이렇게 만들겠다’라는 강박을 좀 내려놓아야 해요. 부모가 놀 거리를 잘 짜줘야 한다는 생각도 필요 없고요. 자꾸 뭘 해 주고 뭘 사 줘야 할 것 같다는 조바심이 들 때는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돈으로 사서 해결하는 게 제일 쉽고 가장 효과가 없다’라고요. (p.227)  

살아 있는 사람의 피부는 숨을 쉬고 있기 때문에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무르기 때문에 찌르면 아픔을 느끼고요. 서투름은 살아 있음의 증거입니다. 인간미는 서투름에서 나옵니다. (p.236)     

열 번의 인터뷰를 하기 위해 6,708킬로미터를 오가며 내가 듣고 싶었던 말, 지독한 완벽주의자의 나라에 사는 한국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결국 이것이었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 그러니 부디 다른 누군가가 되려 하지 말고 나를, 당신을, 우리를 더 믿어주자. 시도하자. 공백을 깨트리자. (p.287)     

- 최혜진,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중 발췌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라는 책의 제목에는 목적어가 빠져 있습니다.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고 있다고는 하지만, ‘무엇을’ 물었는지가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죠. 다분히 의도적인 생략입니다. 저자가 무엇을 물었는지는 오직 책을 완독한 독자만이 알 수 있으니까요. ‘그림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저자가 하고 싶은 진짜 메시지를 말이죠.      



어떤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감탄이 아픔을 동반하면 나는 그 창작자와 사랑에 빠진다.



책의 프롤로그, 첫 줄에 적힌 작가의 고백입니다. 10년간의 직장 생활을 접고 떠난 낯선 이국의 땅 프랑스, 언어가 서툴러 어쩔 수 없이 집은 그림책은 저자에게 저릿한 감탄이 되어 돌아옵니다. 그림책이 태생적으로 지닌 심미성도 한 몫 했지만, 아름다운 그림과 시적인 글보다 저자를 울린 건 그 안에 담긴 메시지였습니다. ‘평등, 우정, 연대, 긍정, 용기’ 등, 어른이 되고 난 후로부터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근원의 지혜이자 여러 문제에 대한 간결한 해답. 예상치 못한 책에서 만난 예상치 못한 직관과 통찰은 저자를 뒤흔들어 놓습니다. 저자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공감 능력을 잃고 혐오와 조롱이 일상이 된, 벌레 먹은 한국 사회를 해독할 성분’을 발견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고.      


이런 사고의 토대에서 발단한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는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단순한 10인의 그림책 작가 인터뷰집이 아닙니다. 물론, 챕터마다 걸출한 그림책 작가를 소개하고, 각 작가만의 작업 방식 등을 논하긴 하지만, 저자의 인터뷰를 따라가다 보면 그가 단순히 ‘그림책 작법’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저자는 작가들의 유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작가이자 동시에 부모인 그들이 현재 어떠한 방식으로 아이들을 양육하고 소통하는지를 묻고 답하면서, ‘상상력과 창의력이 어떻게 발현되며, 무엇으로 이어지는지’를 설명합니다. 더 정확하게는 ‘가사 상태에 빠진 상상력과 창의력을 소생시킬 방법은 무엇이며, 그러기 위해서 부모가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나아가 ‘그렇게 회생시킨 상상력과 창의력이 사회 전체로 보았을 때는 어떠한 이점을 안겨 주는지’에 대해 기술하죠.     


지금의 이 짧은 글을 통해 작가들이 제시한 상상력과 창의력의 근원을 모조리 정리하기란 불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간결하게 요약해 볼 수는 있겠죠. 책에서 제시한 10인의 작가가 내놓은 답을 순서대로 정리해 보자면, ‘애정을 가지고 사물을 관찰하는 태도(조엘 졸리베), 경계를 뛰어넘어 이룩하는 공감(올리비에 탈레크), 우선 질러보는 작은 용기(세르주 블로크), 심심함과 불확실성을 끌어안는 힘(에르베 튈레), 자기 시간에 주인이 되는 방법(이치카와 사토미), 창조를 실현하는 자기 믿음(베아트리체 알레마냐)’ 정도가 되겠네요.     


관찰, 공감, 용기, 불확실성에 대한 용인, 자기 시간의 주체적 활용, 자기 믿음. 열 가지의 키워드를 관통하는 일관된 태도는 바로 ‘수용하는 마음’입니다. 나, 혹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자신만의 속도와 시간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존중하는 포용력. 부끄럽게도 그건 우리 사회에서 가장 결여된 부분입니다. 저자의 표현처럼 ‘벌레 먹은 한국 사회’로 이르게 된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고요.      


저자가 상상력과 창의력에 대한 논의를 수용하는 마음으로 매듭지은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저자는 인터뷰를 통해 무엇을 은유한 것일까요. 완벽하게 짐작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명확해진 것은 있습니다. 상상력과 창의력은 단순히 예술 활동만을 위한 동력이 아니라는 사실이죠. 그들은 예술가만의 특권도, 아름다운 결과물을 생산하기 위한 필수 덕목도 아닙니다. 상상과 창의는 내가 아닌 무언가를 이해하고, 되어보는 경험입니다. 내가 아닌 모든 것들에는 타인뿐만 아니라 동물과 식물, 사물을 포함한 무생물까지도 해당되죠. 이렇게 보면 상상력과 창의력은 공감의 전신이자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도구입니다. 내가 아닌 모든 존재가 되어보며, 서로의 입장을 수용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유용한 장치인 것이죠.     


이제 다시 제목으로 돌아와 봅니다.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저자는 과연 그림책 작가들에게 무엇을 물은 것일까요.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인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하여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는지, 대체 어떻게 ‘유명한 상을 받은 돈 잘 버는 작가’가 될 수 있었는지, 그 방법을 물은 것일까요. 혹은 ‘상상력과 창의력을 잉태하고 발현하는 과정이 근본적으로 무엇을 해결할 수 있는지’를 물은 걸까요. 질문에 대한 답은 이 글을 읽는 분들께 맡기겠습니다. 모든 문제에 대한 해석은 심각한 도덕적, 법률적 결함만 없다면 각자의 방식으로 존중받아야 하니까요. 하지만 다만 바랍니다. 우리 사회의 상상과 창의가 이 이상 흐려지지 않기를, 지금 우리의 시대가 가장 최악의 순간이기를, 바랍니다.           


※ 팬심에서 덧붙여 보는 추신      

: 최혜진 작가의 책을 완독한 건 이번이 4번째입니다. 그림책 이론서 <album[s]>(작가가 역자로 참여)와 국내 그림책 작가들 인터뷰집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가장 최근 출판된 <에디토리얼 씽킹> 그리고 오늘의 서평 도서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까지. 작가의 책은 언제나 제게 감탄을 안겨 주었습니다.


최혜진 작가의 책은 읽기가 정말 편합니다. ‘쉬운 글’이 아닌 ‘편한 글’이죠. 둘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쉬운 글은 문자 그대로 내용이 가볍거나 어휘가 단순해서 읽기 수월하지만, 편한 글은 그렇지 않음에도 술술 읽힙니다. 주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심도 있는 어휘나 표현이 종종 등장해도 걸리는 부분 없이 물 흐르듯 읽히죠. 그런 글은 쉽지 않습니다. 고매하게 보이고 싶은 욕망은 어려운 문체를 동반하기 마련이니까요. 통찰력을 내포하면서도 이해하기 쉽도록 글을 쓰는 건,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최혜진 작가의 글은 제게 상당한 충격이었죠. 20년 차 에디터의 위력은 이런 건가 싶어 존경스러움이 절로 들었습니다.     


작가의 글에는 배울 점이 참 많습니다. 그러니 기회가 된다면 최혜진 작가의 글은 꼭 직접 읽어 보기 바랍니다.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최근에 나온 <에디토리얼 씽킹>을 가장 추천하지만, 그게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어떤 책이든 괜찮습니다. 무엇이든 최혜진 작가의 글이라면, 분명 독자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감흥을 안겨 줄 테니까요.     



이 책을 읽으려고 작정하고 들고 간, 어느 책방


희정서재




< 우연히 만난 책들 >


책방 여행을 다니고 있습니다.

책방을 방문할 때마다 공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책을 한 권씩 구매합니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책들을 그냥 묵혀 두기 아까워 책에 대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 우연히 만난 책들 >은 그렇게 탄생하게 된 글 모음집입니다.

글에서는 책방에서 책을 고른 이유와 책에 대한 소소한 감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달 모나 Monah thedal


링크트리 : https://linktr.ee/monah_thedal

모나 유튜브 : https://www.youtube.com/@monah_thedal

모나 인스타 : https://www.instagram.com/monah_thedal/

모나 브런치 : https://brunch.co.kr/@monah-thedal#works

모나 블로그 : https://blog.naver.com/monah_thedal 

매거진의 이전글 식물만큼 정적으로 치열한, 식물 그리는 사람의 에세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