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산책>, ‘자연책방 소로’에서 우연히 만나지 않은
내 그림은 기록이 목적이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우리나라에 이렇게 아름다운 식물이 자란다니’ 하며 한 번이라도 더 바라보고 이름을 불러주고 기억해 준다면, 그것이야말로 기록 자체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p.45)
식물의 삶을 관찰하다 보면, 눈에 보이는 모습은 그 식물의 삶에서 지극히 일순간의 장면이라는 것, 뿌리나 열매 같은 기관은 생의 어느 순간을 보여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p.97)
도시에서 숲으로 들어온 20대 중반의 내가 하필 이 거대한 침엽수들을 만난 게 우연이 아니라면, 아마도 이들이 내게 가르쳐 주려던 건 ‘식물 하는 사람’이 자연 앞에서 가져야 할 겸손함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p.29)
- 이소영, <식물 산책> 중 발췌
식물 세밀화가가 식물을 보는 방법. 책의 부제에 호기심이 동했습니다. 보타닉 아트(식물 세밀화)를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보타닉 아트가 얼마나 식물을 세세하게 관찰해야만 탄생하는 작품인지를 알고 있을 겁니다. 식물 줄기에 난 솜털 하나, 꽃잎 한가운데에 핀 수술 하나, 이파리 밑에 돋아난 잎맥 한 줄까지 전부 기록하는 그림이 식물 세밀화니까요. 식물을 그토록 곁에 두고 지켜본 이가 해설하는 식물은 분명 어딘가 달라도 다르리라 생각했습니다. 당시 식물 관련 이야기를 쓰고 싶어 식물에 대한 지식을 갈급해하던 제게 안성맞춤인 책이었죠.
시작은 식물이었지만, 책을 읽으며 점차 저자가 식물이 아닌 ‘식물 세밀화가’라는 직업을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식물 세밀화가’라는 직업은 아직도 우리에게 생소한 직종입니다. 회화의 한 형태로, 혹은 디자인의 한 형식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보타닉 아트가 ‘기록’을 위해 탄생한 그림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죠. 보타닉 아트, 식물 세밀화는 식물학자들이 발견하고 채집한 식물을 도감이나 자료에 수록하기 위해 고안된 그림입니다. 식물 세밀화가 또한 식물을 아름답게 그리는 것이 아닌, 식물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종이에 옮기는 사람이고 말이죠.
실제로 식물 세밀화가는 식물원과 수목원에서 근무합니다. ‘식물 종의 보존’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기관에는 그림으로 식물을 기록하는 ‘아카이비스트’인 식물 세밀화가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죠. <식물산책>의 저자 또한 대학에서 원예학을 전공하고, 국립수목원에서 한 명뿐인 식물 세밀화가로 일한, 20년 넘는 경력을 가진 국내에 몇 없는 식물 세밀화가 중 하나입니다. (현재는 식물원이 아닌 개인 작가로 활동 중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식물 세밀화를 그리며, 여러 식물과 식물 세밀화가에 대한 책을 쓰고, 강연도 하고 있지요.)
일반적으로 식물을 그린다고 하면, 수련을 그린 모네처럼 목가적이고 여유로운 화가의 모습을 상상하기 쉽지만, 식물 세밀화가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 돌이나 흙바닥, 풀숲에 주저앉아서 눈으로 본 것을 스케치로 옮겨 담는 것은 일상이고, 걸출한 그림 실력보다 ‘산을 잘 타는 능력’이 더 필요하기도 하죠. 루페(확대경)와 필기도구만 있다면, 어디든 작업실로 만들어 버리는 적응력은 기본으로 지니고 있어야 하고요. 식물 세밀화가의 일상은 식물만큼이나 정적으로 치열합니다. 고요함 속에서 벅차도록 성실해야 하죠.
식물을 그리는 작업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보타닉 아트, ‘식물 세밀화’는 눈앞에 있는 아무 식물을 채집해서 보이는 그대로 담아내는 그림이 아닙니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식물 세밀화는 ‘식물의 보편적이고 대표적인 특징은 드러내되, 개체의 환경 변이 등은 최대한 축소’하여 식물 종이 지닌 가장 보통의 모습을 담아야 합니다. 이토록 기술이 발달한 디지털 시대에 사진이나 영상이 아닌 그림을 고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림은 사진과 달리 여러 개체를 관찰하여 도출된 결과물이기 때문에 ‘특정 개체의 변이’가 담길 가능성이 최대한 배제되니까요.
그래서 식물 세밀화가는 한 장의 그림을 위해 수십 번, 많게는 수백 번 이상 하나의 식물을 마주해야 합니다. 수많은 개체의 꽃의 꽃잎, 암술과 수술, 줄기와 이파리, 열매 등을 일일이 확인하며 가장 ‘표준적인’ 형태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고민하죠. 저자가 매 챕터마다 전 세계 각국에 있는 식물원을 방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특정 식물 종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일본, 중국, 독일, 영국, 네덜란드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식물을 더 잘 볼 수 있는 곳’으로 향해야 하기 때문이죠.
<식물 산책>은 그런 일상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식물 세밀화가를 업으로 삼고 있는 한 사람의 시간을 풀어내는 에세이죠. 식물 세밀화가라는 직업으로의 입문과 초년생 시절, 식물 세밀화가에 대한 오해와 현실 등 식물 세밀화(참고로 저자는 식물 세밀화가 아닌, ‘식물학 그림(botanic art)’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설명합니다.)를 그리는 사람의 고충과 보람을 설명합니다. 아 물론, 식물도 중간중간 다수 등장하긴 합니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면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챕터마다 등장하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식물이 아닌, ‘이소영’이라는 식물 세밀화가의 인생입니다.
그러니 식물 세밀화가라는 세계가 궁금하다면, 식물원을 관람자가 아닌 ‘관계자’의 눈으로 기록해 둔 사진들이 보고 싶다면, <식물 산책>을 펼쳐 보시기 바랍니다. ‘식물’에 대한 생각지도 못한 관점들 속에서 ‘식물 세밀화가’라는 직업이 더 또렷하게 보일 테니까요.
※ 추신
: 제목에서도 보셨다시피, 이번 책은 우연히 만나지 않은 책입니다. 책방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책들로 시리즈를 엮을 요량이었지만, 가끔은 그러지 않는 경우도 발생하네요. 이번 책방에서 구매한 책이 도감과 실용ㆍ전문서다 보니 아무래도 서평을 쓰기가 애매해서 책방의 색깔과 어울리는 책을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가끔 이렇게 다른 책을 소개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