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 쥐 구름과 별>, ‘썸데이북스’에서 우연히 만난
래트를 키우면서 불가사의한 점 중 하나는 보면 볼수록, 날마다, 새롭게 사랑스럽다는 것이다. 동물들이란 어쩜 그렇게 질리지도 않고 매일 사랑스러운지. 정말 희대의 수수께끼다. (p.103)
친구가 될 수 없다면 나는 아이들에게 자연이고 싶었다. 규칙적으로 신선한 물과 먹이를 제공하고 환경을 매만져 주는 다정한 자연. (p.93)
- 정혜원, <실험 쥐 구름과 별> 중 발췌
새앙쥐, 시궁쥐, 들쥐, 쥐새끼. 쥐를 지칭하는 우리나라의 말은 텁텁하고 앙큼하다. 단어의 어감을 되짚다 보면, 쥐에 대한 시선이 어떤지를 짐작하게 된다. 소위 ‘래트’라 불리는 쥐들. 꼬리에 털이 없고, 애니메이션에 튀어나온 귀여움이 없는 담백한 ‘쥐’들은 한 여름밤 천변을 날아다니는 날벌레들, 파리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존재로 취급받는다. 우리의 삶 가장 밀접한 곳에 살아 있지만, 그 존재를 매 순간 부정당한다는 뜻이다.
래트를 반려동물로 들이는 일은, 일종의 용기가 필요하다. 파충류의 먹잇감, 실험체 정도로 인식되는 소모적인 생명체에게 애정을 주고 함께하는 것은, 사회적인 시선으로 봤을 때 기르는 뱀을 매일 밤 품에 안고 잔다는 것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렵고,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험 쥐 구름과 별>의 저자는 대중적으로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을 선뜻 해낸다. 시작은 온라인에서 발견한 어떤 ‘공고문’이었다. 간단한 실험이 끝난 후 안락사를 앞둔 20마리의 어린 쥐들을 입양한다는 글. 햄스터와 물고기 등 소동물을 줄기차게 길러 왔던 저자에게 ‘안락사’라는 표현은 치명적으로 다가왔고, 그길로 쥐를 입양하게 된다.
책은 그렇게 데려온 두 마리의 ‘새앙쥐’에 대한 일화들로 채워져 있다. 몸이 하얗고 눈이 붉으며 유전적으로 치밀하게 통제된 전형적인 ‘실험 쥐’들. 죽는 날까지 실험실 천장 외에는 무엇도 보지 못한 채로 늘 도구적인 대상으로만 취급받던 생쥐들은, 실험실 밖으로 나오자 놀라울 정도로 일반적이고도 평범한 반려동물이 되었다. 인간과 살을 부대끼며 사는 다른 동물과 별반 다를 것 없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재미나게 놀고, 투정을 부리고, 가끔은 인간에게 투쟁하며(?) 일상적이고도 잔잔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페이지마다 나열되는 그들의 지극히 일반적인 일화들을 통해, 나는 늘상 품어 왔던 어떤 생각을 전보다 더 공고히 하게 되었다.
이 땅에서 숨 쉬고 있는 생명은, 종국에는 전부 동일하다.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부터 동물은 늘 빠짐없이 내 인생에 등장했다. 친구에게 얻어왔다가 하룻밤에 돌연 이승을 떠난 소라게, 집 앞 화단에서 멋모르고 데려왔다가 (왜 데려왔냐고 혼꾸녕이 난 후) 하루 만에 자연으로 돌려보낸 달팽이, 한두 해를 함께 보냈던 네 마리의 구피들, 마지막까지 한없이 미안하기만 했던 고슴도치, 십 년 넘게 옆구리에 끼고 살았던 한 마리의 강아지와 지금도 밤마다 침대에서 같이 뒹구는 두 마리의 강아지. 그리고 길에서 만난 동물들. 우리 집을 작은 뷔페로 생각하고 들렸던 십수 마리의 고양이들, 우연히 발견했던 이미 숨을 거둔 쥐와 새(아파트 화단과 강변에 묻어 주었다, 사망 이유는 모른다. 발견했을 때는 이미 죽어 있었으니까), 실내로 잘못 날아 들어와 밖에 도로 풀어 주었던 새와 벌레들까지. 생각해 보면 동물은 언제나 사방에 편재해 있었다.
그렇게 크고 작은 동물들과 부딪치고 엉클어지며 매번 선명해졌던 건 ‘나와 그들이 무엇 하나 다르지 않다’라는 감각이었다. 당연히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고, 생활방식과 행동 패턴이 다르기는 했지만, 그들도 그들만의 기쁨이 있고, 희열이 있고, 호기심이 있고, 슬픔이 있고, 분노가 있었다. 인간의 기준에서 볼 때 단순하고 뭉툭할 수는 있어도, 모든 동물은 매번 저마다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 동물은 그냥 다를 뿐이었다. 다만 그뿐이었다.
그래서 래트를 기르던 저자의 수기가 위안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반려동물’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서열을 나누고, 등급을 매기는 지긋지긋한 편견에서 벗어난 글이어서, 그저 있는 그대로 상대를 받아들이고, 관찰하고, 돌봐 온 세월을 나열한 진솔한 글이어서. 과거의 내가 느꼈던 감정들, 동물은 결국 다 엇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에 마침내 동의하는 이를 만난 것 같아서. 그것이 한없이 무모하다고 손가락질 받을 만한 철학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책은 은은한 위로가 되었다.
생명의 경중, 존재의 중요와 비중요를 감히 구별 지을 수 있을까. 신이 있다면, 그는 그럴 수 있을까. 그에게 정말 그럴 권리가 있을까. 인류의 혜택을 누릴 만큼 누리며 살면서, 이런 입바른 소리를 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화두로 던져보고 싶다.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동물의 급을 나누느냐’고. 우리가 그럴 ‘급’이나 되느냐고. 정말 그러하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