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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 Dec 27. 2018

#01. 프리랜서에게는 무엇이 남을까?

지난 7년간 라디오 프리랜서 리포터로 일하면서

내가 평생을 합쳐도 다 하지 못할 수많은 경험들을 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내가 너무나 좋아했던 방송국에서, 내가 발로 뛰며 취재한 취재물을 통해 정보를 전할 수 있었고, 57분 교통정보, 각종 프로그램의 코너를 통해 내 목소리로 다양한 방송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전국을 뛰어다니다보니 특별한 현장에도 함께할 수 있었어요.

서울역 고가도로가 안전상의 이유 때문에 도보로 걷는 길(서울로7017)로 바뀌게 되면서

차도로서의 서울역 고가도로의 마지막 모습을 소리로 담은 경험이나,

우리나라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스위치백 열차가 폐선되기 전 마지막 운행 모습을 담은 경험,

그리고 섬진강의 아름다운 모습을 주민들이 직접 만든 카누를 타고 즐길 수 있는 카누 체험장의 풍경은 결코 잊을 수 없을겁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는 것도 내게 큰 공부였습니다.

불법 하도급과 장시간 노동 근절을 외치며 투쟁하다 고공농성을 벌일 수 밖에 없었던 두 노동자,

한여름 옥탑방 천장으로 전해지는 40도가 넘는 열을 차단해줄 특수 페인트를

청년들을 위해 무료로 발라주던 분들... 뉴스에 나온 몇 줄의 기사로는 미처 담을 수 없는 뒷 이야기들을 실제로 마주하면서 우리 주변에서 이렇게 다양한 일이 일어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실감 할 수 있었습니다.




좋은 방송을 위해 전국 어디든 마다않고 달려가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라고는 하지만

밤낮도, 휴일도 따로 없이 일하다보니 우리가 잃는 것도 많았습니다.


우선 가장 먼저 잃는 것은 입니다.

일이 정말 많았을 때는 밤낮 구분 없이 출근해야 하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밖에서 취재를 하고 편집해서 하나의 취재물을 만드는 것이 주 업무였던 나는 출근지가 일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취재처가 강원도면 그 시간에 강원도에 있어야 하고, 노량진 수산시장 경매 모습이라면 새벽 3시에 장화를 신고 경매장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죠. 그것이 끝이 아니라 취재부터 편집, 원고작성까지 모두 내가 맡는 내 일의 특성 상 시간을 다투는 취재물이라면 바로 상암동 회사로 넘어가서 편집을 해서 방송을 할 수 있게 넘겨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과로는 기본이고 식사를 제 때 챙기는 것은 더 어려웠어요. 아마 방송 직군의 이야기 만은 아닐 것입니다. IT, 예술 등 다양한 직군의 많은 프리랜서들이 신체 건강부터 잃어갑니다.


정신적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습니다.

회사와의 계약관계만 프리랜서이지, 회사의 일은 공채 리포터들만 할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다른 회사의 일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각 PD가 우리에게 일을 주지 않으면 우리는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구조라는 점이 한계였습니다. 그래서 개편 주간에는 모두가 신경이 곤두서있습니다. 어떤 프로그램이 없어지는지, 어떤 코너가 생기는지에 따라 우리의 걱정이 늘었다, 줄었다 했거든요.


뭐... 코너가 폐지 되는 일은 익숙하지만 갑작스럽게 '다음주부터 안나와도 돼요.'라는 통보를 받거나 작가로부터 '그 코너 없어졌어요.'라는 말을 듣는 일 등은 내가 같이 일하는 동료가 아니라 '쓰고 자르기 편한 사람이었구나' 하는 자괴감 역시 들게 했습니다.


또한 대놓고 갑질을 하는 피디나 이미 책정되어있는 (10년 넘게 동결상태인) 출연료를 후려치기 하는 피디와는 일하고 싶지 않지만 계속 얼굴을 봐야 하는 사이이고, 내가 거절했을 때 리포터 전체에게 피해가 갈 것을 걱정해서 그냥 일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밤낮도, 휴일도 없이 8일간 격무에 시달리다가 드디어 새벽녘에 퇴근해서 온전히 하루를 쉴 계획에 잠들어있던 어느 아침이 기억납니다. 방송국 모 피디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급한 취재가 있으니 취재를 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나는 사정을 이야기하고 오늘 못 쉬면 앞으로 이어지는 며칠간의 일에 지장이 있을 것 같다고 죄송하다고 이야기하고 전화를 끊으려던 참이었습니다.

"프리랜서가 쉬는 날이 어디있어? 5분대기조지..."
격앙된 목소리가 날아들었습니다. 끊고 나서 마음이 너무 불편했습니다. '정말 내 잘못일까? 힘들 때 힘들어하면 안되나?' 후에 다른 선배들에게도 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유... 그렇게 힘들면 거짓말을 해야지. 다른 취재가 있다고~ 그런게 요령이야." 그의 말 그대로 나는 프리랜서인데 쉬고 싶을 때 프리하게 쉬는 것은 왜 안되는 일이었을까?


건강을 잃으면 또 하나 같이 잃는 것은 입니다.

계약 조건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건 바이 건으로 수당을 지급받는 프리랜서들은 아프려야 아플 수가 없습니다. 내가 일을 안하면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이죠.


는 입사 2-3년차에 극심한 스트레스로 깊은 우울감에 시달린 적이 있습니다. 일만 하고 들어와서 죽은 듯이 잠만 자고 일이 없으면 오후 4시까지 자도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밥도 먹기 싫었고 먹지 않았는데도 살이 쪄서 내 모습을 보기도 싫었지만 그렇다고 누워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내가 약속한 업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종 운동과 약값으로 내가 번 돈을 거의 다 쓸 수 밖에 없었고, 나중엔 일을 줄이면 모아둔 조금의 돈으로 생활을 하기도 했기 때문에 7년간 일을 한 뒤에도 내게 남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한 1달정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고향에서 좀 쉬었더라면 지금까지 그 영향이 남을 정도로 심하게 아프지 않았을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들지만 그 당시의 나는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자신을 의심하고 있었고,

외부에서 나를 평가하는 말에만 귀를 기울이면서 내가 뭘 잘 할 수 있겠어..하는 생각만 했습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 어둠의 동굴에서 지내다가

한 걸음씩 동굴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은 바로

내가 나를 온전한 '나'로 들여다보기 시작한 직후였습니다.


나는 무슨 일을 할 때 즐거웠지?

사람들에게 어떤 느낌을 줄 때 내가 행복하지?

직업인으로서의 내가 아니라 그냥 하지나라는 사람으로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돌아보게 되었고

나는 왜 이 일을 하는지 다시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다양한 표현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호기심이 많아서 사람들을 만날 때 좋은 질문으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고,

아이디어가 넘쳐서 재미있는 주제들을 잘 잡아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말과 글을 활용하면서 일하는 것이 좋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 듣고 그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좋고,

평소에 못 해볼 경험들을 많이 해서 좋고,

내 목소리로 방송 하는 것이 좋고,

고향 부모님께 자랑거리가 될 수 있어서 좋고....

생각해보니 내가 일을 하고 싶었던 이유도, 이 일을 좋아하는 이유도 명확했습니다.

물론 터널을 완전히 빠져나오는데는 이 이후로도 꽤 고통스러운 과정들을 거쳐야 했지만

이런 나의 모습을 인정하고 지금까지 나의 성과를 인정해주는 것이 첫 발이었다는 것 만큼은 확실합니다.

그렇게 나는 프리랜서 생활을 통해 나 자신과 친해졌습니다.


프리랜서에게는 승진도, 보너스도 없을 뿐더러

내가 하는 것이 이 회사에 도움이 되는구나! 하는 보람도 느끼기 힘듭니다.

그래서 나 스스로가 끊임없이 나를 냉정하게 돌아볼 수 있어야 하고, 나를 다독여주고 안아줄 수도 있어야 합니다.


내가 어떤 말을 듣고싶어 하는지, 어떤 것을 얻고싶어 하는지 잘 들어주고 내가 거기에 귀를 기울여야합니다.

외부에서 오는 칭찬에 길들여지다 보면 내가 기대했던 그 칭찬이 주어지지 않을 때는 내가 쓸모없는 것 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세상 마지막 날까지 나를 믿어줄 사람은 "우선" 나 자신이어야 합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당신을 믿어 줄 사람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사람들 속에는 당신도 포함되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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