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 이후 달라진 것과 병으로부터 배운 것

치료 후의 이야기 #2

by 이대


다가올 시간 속의 너는 나를 잊은 채로 살겠지
하지만 잊을 수 없는 게 조금은 남아있을 거야
(…)
새로운 세상으로 가면 나도 달라질 수 있을까
맘처럼 쉽진 않겠지만 꼭 한번 떠나보고 싶어

- 언니네 이발관, <산들산들>


안녕하세요, 선생님.

환절기 일교차 큰 날씨에 기체후 일향만강하신지요.


퇴원 후 어느덧 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무래도 제 상태의 향방을 궁금해하실 것 같아,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렇게 펜을 듭니다. 선생님께 보내어 드리는 글을 적으면서 저도 지금의 제 상태를 한 번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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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서는 MBTI를 믿으십니까?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상당히 신뢰하는 편입니다. MBTI는 타로점이나 별자리 운세처럼 그저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항목들의 선택을 통한 귀납적 추론의 결과물일 테니까요. 과거 MBTI검사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 결과로 나온 제 MBTI는 INFJ였습니다. 당시엔 그저 ‘내 엠비티아이는 그거였구나’하는 정도로만 생각했을 뿐이었지만 얼마 전 나무위키(온라인 백과사전과 같은 것입니다)에서 항목을 검색해 보고는 정말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 스스로 이렇다 판단하고 있던 사항들이 구체적인 문장들로 정리되어 있었으니까요. 그 중에서도 ‘본인과 맞는 사람과 맞지 않는 사람을 빠르게 판단하며 맞지 않는 사람과는 거리를 둔다’라는 문장을 보곤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건 가까운 이들에게 제 성격에 대해 이렇다 이야기해온 것을 정말이지 그대로 문장화해 둔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MBTI에 대한 제 신뢰는 한층 더 두터워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 성격은 예전과 비교해 봤을 때 한참이나 달라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나 ‘계획적이고 체계적이며 목적의식이 뚜렷한 성격’을 나타낸다는 J 항목은 다시 검사해 본다면 분명 P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유동적이고 융통성 있는 성격’을 의미하는 P로 말입니다. 그렇게 달라진 건 아무래도 뇌종양 진단과 치료를 받으며 겪었던 일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한참을 병의 증세에 시달리다 입원해 받은 치료들, 그리고 그와 함께 경험한 힘겨운 MRI촬영이나 뇌수술 등의 경험들 말씀입니다. 큰 병치레를 겪어낸 이들은 성격이 좀 느긋해진다 하던가요. 그런데 그것보다 제 달라짐의 더 큰 이유는 세상이란 내가 원하는 바대로만 굴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Anima Sana In Corpore Sano)’고들 말합니다. 그 말마따나 나약한 육체에는 나약한 정신이 깃들게 되는 모양인가 봅니다. 병인 줄도 모르고 증세에 시달리던 오랜 시간과 항암치료 방사선치료를 행했던 반 년이라는 시간. 그 시간들을 버티며 거치는 동안 제 육체는 허약해졌고 그에 따른 저의 정신 역시 약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렇게 약해진 정신은 지금껏 제가 지니고 살아왔던 삶의 태도를 상당 부분 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어쩌면 이전처럼 살아간다는 것이 더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수용의 마음가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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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지금에 와 떠올려 보면 과거의 저는 어쩜 그렇게나 꽉 막힌 인간이었던 걸까요. 직선적이고 고집 세고 세워 두었던 계획이 흐트러지는 걸 못 견뎌 하고 계획의 어긋남에 따른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 많은 것들을 닫아 둔 채 살았던, 어쩌면 나밖에 모른다고 해도 좋을 과거의 저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는 예전과 상당히 달라졌습니다. 여유 있고 받아들이고 유들유들해지고(물론 긍정적인 의미에서 말입니다) 세워 둔 계획이 헝클어지더라도 ‘뭐, 될 대로 되겠지’하는 태도의 마음가짐으로요. 과거의 저를 알던 사람들이 지금의 저를 다시 만난다면 아마 깜짝 놀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퇴원 직후 제 나이 스물여덟하고도 반년이었는데 사회 진출에 필요한 준비랄 것 전혀 없었음에도 미래에 대한 걱정, 취직에 대한 우려 따위도 별반 없었습니다. 역시나 그저 ‘다 될 대로 되겠지 뭐’하고 생각했을 뿐이었습니다.


저밖에 모르던 과거엔 혼자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따위도 없었습니다. 그만큼이나 정신적으로 건강했고 제가 가진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으니까요. 대학 입학 후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사귀었던 여자친구와 헤어진 이유 역시도 아마 저의 그런 태도 때문이 컸을 것입니다.

그런데 치료를 마친 뒤엔 혼자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어찌나 버겁기만 하던지요. 한참이나 약해진 정신력 탓에 혼자만의 힘으로는 삶을 살아갈 자신이 도무지 없었습니다. 선생님, 때문에 저는 제 몸을 기댈 누군가를 찾기 위해 정말이지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 시간은 이전까진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시간들 속에서 마음을 표현했던 이들 가운데 어떤 이들로부터는 거절당했고 누군가들과는 짧은 연애를 몇 차례 하기도 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마지막으로 만난 마음 맞는 단짝과는 오랜 시간(지금까지도) 서로 기대며 삶을 함께하는 중입니다.


과거 혼자됨에 대한 두려움이 없던 것은 타인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가족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동생의 대학 입학 후 제가 다니던 학교로부터 대중교통으로 30분 남짓 걸리던 동생의 학교였음에도 저는 동생과 함께 살지 않겠다 했더랍니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동생과 함께 살게 된다면 제 삶이 방해받을 것 같다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동생뿐 아니라 부모에게도 마찬가지로 저는 가족의 일원으로서 한참이나 부족한, 까칠하기만 한 큰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뇌종양 진단 후 병원에 입원해 간병인으로서의 엄마와 함께 지내던 시간과 퇴원 후 엄마 그리고 동생과 함께 살던 시간들 속에서 저는 가족의 사랑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중학생 시절 이후 정말로 오랜 시간 만에 함께하는 '가족'이란 공동체의 품 안에서 말입니다. 이후 가족을 대하는 저의 태도 역시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가족에게 한참이나 살가운 큰아들로서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 역시도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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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이야기가 나온 김에 성격 변화에 대해 조금 더 말해 보고자 합니다. J에서 P로의 달라짐과 함께 제 마음가짐에서 긴장감이랄 것이 사라졌다는 점 역시도 커다란 변화라 생각됩니다. 긴장이 없다는 게 좋기만 할 것 같아도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게, 살아감에 있어 필요한 정신적 충격을 받을 만한 큰일을 겪더라도 긴장은커녕 놀라지도 않게 되어버렸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얼마 전, 일이 있어 고속도로를 조금 빠른 속도로 달리던 중에 큰 사고가 날 뻔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터널을 빠져나와 어두웠던 시야가 밝아지는 순간 바로 눈앞에 있던 차량을 그제서야 발견한 것입니다. 핸들을 꺾어 비어 있던 옆 차선으로 들어설 수 있었으니 망정이지 까딱 잘못했으면 100% 대형 사고에 이르렀을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까스로 사고를 피한 시점에서 저를 당황케 했던 건 사고가 날 뻔했다는 그 사실이 아니라 제 심장박동이나 호흡, 긴장의 정도나 기분의 변화가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저 한참이나 일상적인 기분으로 차분하기만 했습니다. 가만히 앉아 그런 제 상태를 보고 있자니 ‘혹시 뇌수술 과정에서 어디를 잘못 건드린 거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을 정도였습니다. 나이가 들면 감정의 폭이 줄어들고 성격도 얼마간 무던해진다 하던가요? 하지만 긴장감의 상실이란 그것과는 조금 다른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역시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것 역시 달라진 점이라면 달라진 점이겠습니다. 이것도 긴장의 사라짐과 비슷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선생님, 내면적인 성향 변화뿐 아니라 치료를 마친 후 밖으로 세상을 대하는 저의 태도 역시 달라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대학 시절 만난 승현이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언젠가 그는 어릴 적부터 자신의 누나가 너무나 바보 같아 보여 줄곧 무시해 왔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병원에 가 진단을 받아 보니 사실 누나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두뇌에 어떤 문제(장애)가 있었고 그 탓에 두뇌를 사용하는 데 불편함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두뇌의 장애에도 그 정도의 상태라면 누나는 정말 열심히 살아왔던 거라는 사실도요. 의사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자 누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는 그의 이야기였습니다. 누나에게는 승현이에게 무시 받을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상대방이 처한 상황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내 상황에만 비추어 상대를 파악하고 평가하는 것은 참으로 부족한 행동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약한 이들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들을 이해할 것을 기대하기란 어려울 거라는 생각도 또한 듭니다. 그들의 사정 속으로 직접 들어가 보지 못한다면 이해란 결코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니까요.


언젠가 제 작고 힘없는 글씨체를 살짝 놀리듯 말하는 어떤 이가 있었습니다. 그 이에게 저는, 좌뇌에 종양이 발병했던 바람에 오른손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그렇다 하고 얘길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제 얘길 들은 그 사람은 ‘아닐 텐데…’ 하며 살짝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선생님, 아팠던 게 제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그런 비웃음을 당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것 아닙니까?


지금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과거엔 저 역시 부족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병에 걸리기 전,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기만 한 상태일 때의 저는 제 몸이 정상이라는 사실에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비정상적인 사람들 혹은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이들로부터 그저 한결같은 부정적인 감정만을 느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병을 경험하고 난 이후엔 조금은 달라졌습니다. 저에게 혹은 그들에게 찾아온 질병 또는 장애란 결코 내가 원해서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 당연한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은 것입니다. 이후 사회적으로 약한 이들로부터 제가 느끼게 된 것은 연대감과 동질감이었습니다. 나도 한때 정상적인 쪽에 서 있었지만 언제든 다른 편으로 넘어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약자, 아픈 사람들, 장애를 가진 이들은 나와 다른 집단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같은 선상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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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를 마친 후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한 모자(母子)와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슬픈 아름다움이란 감정을 느끼게 했던 모자라 하면 어떨까요 선생님.


‘슬픈’이라는 수식어와 ‘아름다움’이라는 피수식어는 적절하지 않은 수식이라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그랬으니까요. 슬픔이라는 부정적인 의미의 단어와 아름다움이라는 긍정적인 의미의 단어. 슬픔이라는 어두운 감정과 아름다움이라는 환한 정서. 이 둘을 수식어와 피수식어로 묶기에는 그 차이란 너무나 극단적이기만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슬픈 아름다움과 실제로 마주하고 난 이후로는 그 두 단어 이외엔 달리 표현할 적절한 단어를 찾기 어렵겠다는 확신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책을 사야겠다는 특별한 목적도 없이 광화문 교보에 가 어슬렁거리던 참이었습니다. 아마도 누군가와 종로 부근에서 만날 약속이 있던 날이었을 겁니다. 약속시간까지 시간이 남아 평소처럼 교보문고로 내려갔습니다. 내려간 계단 앞으로 쭉 이어진 베스트셀러와 소설류의 부스를 한 바퀴 둘러보고 모퉁이의 잡지 판매대를 들러 몇 권의 남성지를 훑어보며 그저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차, 걸어 들어갔던 아동용 도서 부스에서 저는 그 모자와 마주쳤습니다.


남자의 나이는 얼핏 보더라도 30대 후반 혹은 마흔 즈음 그리고 그 옆의 여자는 예순 정도의 나이로 보였습니다. 짐작건대 엄마와 아들인 것으로 보이는 그 모자는 아동용 도서 부스를 서성이며 책을 고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마법 천자문’혹은 ‘한국사 대모험’등과 같은 어린이용 학습 만화들이 놓여 있던 부스에서요. 흐리멍덩한 표정으로 책장 사이를 걸어가고 있는 남자 곁에서 중년의 여자는 마치 남자를 부축하듯 걷고 있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신경이 쓰여 지켜보고 있던 저에게 나이든 여자가 남자에게 하는 말이 들려 왔습니다. “그 책으로 할래?” 유치원 혹은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에게 엄마가 전하는 듯한, 조심스러운 말투의 문장들과 뒤이어 아무 말 없이 아무런 표정도 없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남자. 그 둘이 처해 있는 상황이 머릿속에 와닿은 순간 제 눈에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엄마는 어째서 나이 많은 아들을 위해 어린이용 학습 만화책을 사 주던 것일까 어떤 희망을 가지고 아동 서적을 구입하는 것일까 그녀가 가진 그 희망은 과연 언젠가는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 과연 그럴까. 둘을 바라보며 흘렸던 눈물은 그런 생각들이 합쳐져 나온 눈물일 것입니다. 그리고 저 역시 한 발만 더 내디뎠더라면 어쩌면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흘러나왔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앵무새 죽이기>의 작가 하퍼 리는 “타인을 이해하려면 그 자신의 입장이 되어 보아야 한다. 그의 피부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걸어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선생님, 지금의 저는 그의 말을 부족하나마 온몸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뇌종양이라는 병을 통해 저에게는 개인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고 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변화와 배움 가운데 가장 큰 의미를 지닌 것은 세상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일 것입니다.

허약해진 제 신체와 정신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시금 정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하지만 달라진 삶의 태도, 그리고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다행스럽게도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제 곁에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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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직접 찾아뵙지 못하고 이렇게 글로 제 상태를 전해드리는 점 죄송합니다. 조만간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몸 건강하신 모습으로, 만나 뵙는 날까지 안녕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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