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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책을 쓰게 될 줄이야

<빠르지 않아도 괜찮아, 아이와 걷는 지금이 좋아>를 출간하기까지

by 니나

“내가 책을 쓸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내 안의 소리와 싸워야 했다.


1. 백일장이나 글 쓰기 대회에서 상 한 번 타본 적 없으면서 갑자기 책이 웬 말이야?

2. 시간을 엄청 써야 할 텐데.

3. 누가 볼까 봐 일기장도 버리면서 누가 네 이야기를 보는 걸 감당할 수 있겠어?

4. 고3 때 논술 쓰다가 머리 쥐어뜯었던 거 기억 안 나?

5. 만약 썼다고 쳐. 아무도 출판해 주지 않으면 어쩔 건데?


대답 1. 글쓰기 대회에서 상은 못 받았지만, 마음을 전하는 편지는 곧 잘 썼잖아.

대답 2. 그래서 핸드폰을 덜 하게 되겠지.

대답 3. 지난 2년간 아침 일기를 써보니 알겠더라. 내 이야기가 남이 보면 안 될만한 이야기는 아니란걸.

대답 4. 논술이랑 이건 다를 거야. 그림책 에세이 쓰기 동아리에서 머리 쥐어뜯으면서 3년간 매달 에세이를 써왔잖아.

대답 5. 출판해 주지 않으면 자비출판이라도 하면 돼지. 그것도 안 되면, 미국에서 귀국한 다음에 협력 교사로 일하면서 모은 돈으로 출판사 등록이라도 해서 내가 책을 내버리자.


이렇게 간단하게 썼지만, 결론에 다다를 때까지 일주일을 고민했다. 학창 시절에는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일인지 무게를 두기보다 이게 전망이 있는지, 취업에 도움이 되는지를 생각했다. 결혼 후에는 아이들을 돌보며 생활비를 아껴야겠다는 생각으로 최대한 아끼며 살았다. 나를 위해 돈을 쓰는 것을 사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결국 나 자신을 뒤로 미뤄버렸던 거다. 그렇게 나를 포기해서 대단한 부동산이라도 샀다거나 부자가 되었으면 몰라,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이렇게 사는 건 너희 때문이잖아.”라는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말을 나이 들어 내뱉지 않으려면 내 마음을 들여봐야했다. 더 이상 가족을 핑계로 내 삶의 주도권을 미룰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쓰고 싶으면 일단 써!”

이제 더 이상 하지 않았던 것 때문에 후회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미국에 귀국한지 일 년이 넘어가기 전에 책을 쓰고 싶었다. 서둘러야 했다. 내 쓰고 싶은 이야기는 미국 국립공원에서 트레킹했던 이야기니 다가올 여름휴가 전에는 책을 완성하고 싶었다. 그래서 미국 국립공원으로 여행가는 한두 명에게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왜 미국 국립공원 트레킹일까."

책을 쓰려면 이 질문에 먼저 답해야 했다.

“나의 삶은 내가 초대한 불편들로 채워져 있고 나는 그 속에서 편안하다. 불편함은 우리의 감각을 깨우고 우리를 진정으로 살아 있게 한다.” 『편안함의 습격』 존 프랭클이 쓴 추천사 중 일부

“자연은 인간의 심미적, 지적, 인지적, 나아가 영적 만족의 열쇠를 쥐고 있다.” 『바이오필리아』 에드워드 윌슨

“신경쇠약과 과도한 문명에 지쳐있던 사람들은 드디어 깨닫기 시작했다. 산에 가는 것이 곧 집에 가는 것임을, 인간에게 자연은 필수임을, 산림 공원과 자연 보호 구역이 목재와 관개수로의 원천일 뿐 아니라 삶의 원천이기도 한다는 것을” 존 뮤어

“더 힘들게 얻은 것일수록, 더 큰 행복을 느낀다.” 조너선 하이트 『행복의 가설』


나는 수많은 학자와 자연론자들이 말했던 ‘자연에서의 행복’을 트레일을 걸으며 느꼈다. 마이클 이스터가 『편안함의 습격』에서 알래스카에서 경험했던 고요함만큼은 아니겠지만 미 서부의 아치스 국립공원과 캐니언 랜드를 트레킹하며 생전 처음 느끼는 고요를 만끽했다. 사람들이 그랜드 서클을 여행할 때 방문하는 도시 페이지에서 모뉴먼트 밸리까지 가는 붉은 황야는 어디에서 내려도 압도하는 풍경이었다. 시간도 정지한 듯한 황야에 차를 세우고 그 고요함 속에 머무는 것은 혼잡한 관광지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경험이었다. 늘 손에 쥐고 있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우리는 식당 대신 탁 트인 바위에 앉아 점심을 먹기도 했다. (어차피 핸드폰이 터지지 않는 곳이 많았다).

『사막의 고독』의 작가 에드워드 애비는 “황야는 사치품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에 꼭 필요한 필수품”이라고 말한다. 이제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사막의 고요함 속에서 내 영혼의 어딘가가 정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스 신화의 시지푸스처럼 걸어 올라간 길을 다시 되돌아 내려오는 고행 같은 트레킹을 심지어 아이들과 함께 반복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산을 오르내리는 일은 개고생이나 다름없었다. 처음에는 힘들어하던 딸이 나중에는 트레킹을 즐기게 된 것이 믿기지 않았다. 딸은 나중에 거리 감각이 생겼고, 우리 짐을 나눠 들을 수 있을 만큼 튼튼해졌으며, 산의 야생동물과, 졸졸 흐르는 냇물, 바위, 지층 모든 것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아쉽게도 한국에 돌아온 후에는 남편과 내 산행에 동행했던 건 울산 바위가 전부지만 말이다.


책을 쓰는데 또 다른 역할을 했던 건 이 년 전 아들과 나눴던 대화였다. 학년 초면 으레 학교에서는 아이들의 장래 희망을 물었다. 아들은 장래 희망을 꼭 정해야 한다는 것이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생각하다 생각하다 아들이 물었다.

“엄마는 꿈이 뭐야?”

“엄마? ISBN”

난 아이들과 연동된 인생은 사양이다. ‘네가 잘되는 것이 내 꿈이야.’ 같은 말은 내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출판 등록 번호인 ISBN이라고 말하다니.

나는 취미에 ‘독서’라고 당당히 쓸 수 있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초등학생 시절 엄마가 사주셨던 학원 출판사의 메르헨 동화 전집을 시작으로 나는 독서와 사랑에 빠졌다.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그러다가 글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예전에 썼던 블로그 글을 읽다가 20대에 비공개로 썼던 글을 발견했다. ‘내 꿈은 동화 작가다.’라는 글이었다. 얼마나 놀랐던지. 나는 글을 잘 못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글을 너무 쓰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내가 썼던 블로그 글을 읽은 후에도 몇 년동안 글쓰기에는 손도 대지 못했다. 그러다가 줄리아 카메론의 『아티스트 웨이』라는 책을 만났다. 그 책을 읽고 나는 바로 모닝 페이지를 시작했다. 새벽에 일기를 쓰면 쓸수록 ‘왜 남이 내 글을 보는 걸 그렇게 강박적으로 힘들어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내 일기를 만약 본다고 해도 그게 뭐 어때서? 내 슬픔이나 내 생각이 나쁜 것도 아니고,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이제 누가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어떤 마음인지 알게 돼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흔이 되어서야 스스로를 옭아맸던 강박에서 자유로워졌다.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 모닝 페이지를 썼다.


미국에 가서도 새벽 일기 쓰기는 계속됐다. 날마다 주방 베란다 창문을 열고 집 앞에 해가 뜨는 모습을 찍고 일기를 쓴 다음에 남편과 아이들 도시락을 만드는 것이 아침 루틴이었다. 『아티스트 웨이』처럼 날마다 세 페이지를 쓰기에 내 노트는 너무 컸다. 나는 매일 아침 노트 한 페이지를 채웠다. 2025년 6월에 출간한 『빠르지 않아도 괜찮아, 아이와 걷는 지금이 좋아』는 모닝 페이지가 만들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매일의 글쓰기가 되어 책을 출간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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