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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기처럼 썼던 글이 씨앗이 되었다.

<빠르지 않아도 괜찮아, 아이와 걷는 지금이 좋아>를 출간하기까지

by 니나

“5년 안에 ISBN”

아이들에게 5년 안에 ISBN을 받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는데, 작년 11월 책을 쓸 결심할 당시에 남은 시간은 겨우 3년이었다. 3년은 뭔가를 시작하기에 긴 시간이기도 하고 짧은 시간이기도 했다. '동화를 쓰고 싶었기 때문에 열심히 준비해서 3년 안에 데뷔하고 싶어.' 라는 생각은 일종의 회피였다.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미국 국립공원 트레킹 이야기를 쓸 용기도 내지 않고 나중에 열심히 동화를 준비하겠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글, 그걸 먼저 써야 했다. 그럼에도 도서관에 꽂힌 수많은 책을 보며 내 책이 저 책들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내 그저 그런 이야기는 애꿎은 나무나 자르는 일에 불과하지 않을까 고민했다.


가장 큰 고민은 에세이라는 장르 때문이었다. 에세이는 대작가들이 쓰는 장르라고 생각했다. 여행지에서의 경험이 아니라 여행의 의미와 이유를 따라가며 사유를 펼쳐 낸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 조지 오웰이 민병대원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후 쓴 『카탈로니아 찬가』, 진정한 독후감은 이런 글이구나 깨닫게 했던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 그림책 에세이스트 수업 선생님이셨던 한미화 작가의 『유럽 책방 문화 탐구』. 이렇게 짱짱한 에세이 책들 속에 내 책이 설 자리가 있을까. 나는 깊이 생각하는 것을 귀찮아하는 게으름뱅이인지라 1차원적인 이야기만 실컷 늘어놓을지도 몰랐다.


무언가를 하지 않을 이유를 만드는 생각은 그만해야 했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읽고 아이들과 함께 미국 국립공원을 트레킹할 수도 있었다. 다른 책에 언급되지 않은 트레일을 걸었던 경험이 독자에게 도전 의식을 줄 수도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트레킹 이야기를 읽은 독자가 트레킹 여행도 할 용기를 얻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국 국립공원이 아니더라도 동네 뒷산이라도 걷는다면, 아이들과 실내를 벗어나 숲과 나무, 탁 트인 바다, 핸드폰을 손에서 놓을 수 있는 어딘가로 떠날 수 있게 된다면 그걸로 내가 이 이야기를 쓸 이유는 충분했다.

도서관은 이런저런 책들이 꽂혀 있는 곳이다. 메이저 출판사의 책이나 대작가의 책만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애당초 비교 대상부터 틀렸다. 그런 작가들과 나를 비교하려고 하다니. 눈만 저기 천상계에 있다.

“지금 쓸 수 있는 것부터, 지금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것부터 쓰자. 조금 더 지나면 머릿속에서 사라질 국립공원 이야기를 얼른 꺼내자.”

나는 내 수준과 내 한계 내에서 책을 쓰기로 했다.


2020년도였던 것 같다. 『아티스트 웨이』에서 모닝 페이지만 매일 쓰면 누구든 작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귀가 얇은 편인가 보다. 매일 세 페이지씩 일기를 쓰면 된다는 말에 당장 일기를 쓰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일기를 썼지만 작가가 되지 못했다고 해서 손해 볼 것도 없었다. 나는 4년 동안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물을 마시고, 신중하게 연필을 골라 30분 정도 새벽 일기를 쓰며 아침을 시작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육아 자체가 진이 빠져서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었는데, 아이들이 초등학생이 된 이후에는 일어나고 자는 시간이 일정해져서 내 생활 리듬도 충분히 조절할 수 있었다.


혼자 매일 주야장천 일기를 쓰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나는 함께 일기를 쓸 것 같은 사람을 물색했다.

“혹시, 아침 일기 같이 쓰실래요?”

일기를 쓸 것 같은 지인에게 불쑥 물었다. 얼굴은 알지만, 개인적인 접점은 없었던 분이었다.

“모닝 페이지 말이에요?”

당시에 나는 그림책에 푹 빠져 있었는데, 그림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체로 비슷한지, 내가 새벽 일기가 뭔지 설명을 하기도 전에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단번에 알아맞히며 말했다.

“네, 할래요.”

그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무언가를 혼자 하다가 느슨해졌을 때, 추진력이 필요할 때는 함께 할 동지를 찾아보자. 일주일에 한 번 우리는 각자 쓴 일기 중 한 편을 개인적인 부분은 빼고 낭독했다. 덕분에 일주일에 한두 번은 객관적인 시각으로 일기를 쓸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출간한 책은 『빠르지 않아도 괜찮아, 아이와 걷는 지금이 좋아』라는 다소 긴 제목이다. 이 책은 우리 가족이 미국에 1년 반 체류했을 때 미국 국립공원 13군데를 트레킹했던 이야기다. 미국에 살면서 두 번의 크리스마스 연휴와 한 번의 여름방학을 보냈다. 그래서 그때마다 국립공원으로 긴 여행을 갈 수 있었다.

남편과 아들은 야행성, 딸과 나는 아침형 인간이다. 하루치 트레킹을 하고 숙소에 도착하면 나와 딸은 씻고 자기 바빴다. 남편과 아들은 피곤할 텐데 잠을 자지 않고 책을 읽거나 하면서 하루를 정리했다. 나와 딸은 아침 일찍 일어나면 곯아떨어진 두 남자를 깨우지 않으려고 화장실에 바스 타월을 깔고 책을 읽고 일기를 썼다. 우리는 아침 6, 7시면 일어나는데 두 남자는 9시는 되어야 일어나니 시간이 얼마나 많은지. 덕분에 일기를 쓰고 써도 시간이 남아돌았다.

미국에서 여행할 때는 내 여행기가 책이 될 거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여행을 마친 후 브런치에 업로드하는 것은 생각보다 벅찼다. 다른 사람들은 재치 있게, 혹은 정보를 알차게 담아서 글을 잘 쓰는데, 내 글은 재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정보가 담긴 글도 아니었다. 그냥 일기장을 옮긴 글이나 다름없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후, 좋아하는 카페였던 Poor Richard에 노트북을 가지고 가서 일기장을 참고해 브런치 글을 썼다. 여행지에서 돌아오자마자 기억은 벌써 저 멀리 휘발되었다. 굵직한 몇 가지 특별한 사건들만 머릿속을 맴돌 뿐이었다.

비록 브런치 글은 엉망이었지만 일기와 기억을 짜내서 올렸던 브런치 글, 핸드폰 메모장에 저장해 뒀던 정보들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책을 쓰기로 작정한 후, 브런치, 메모장, 딸의 일기장, 남편과 아들의 핸드폰 사진, 국립공원에서 받은 신문과 주니어 레인저 책까지 긁어모았다. 기록과 사진을 보니 다시 여행을 떠나는 것 같았다. 나는 ‘기록’이라는 습관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지금 브런치를 쓰고 있는 지금의 내 아침 습관을 돌아본다. 내 아침은 요즘 엉망진창이다. ‘아침에 일어나 이부자리에서 기지개를 켜고, 깨끗하게 이불을 접어둔 다음에 물을 한 잔 마시고, 책을 읽고 일기를 쓴다.’ 이렇게 오랫동안 아침을 보냈건만, 휴대폰 때문에 습관이 망가지고 있다. 커피를 내리면서 잠시 휴대폰 기사를 확인하다가 웹서핑을 하다 보면 뭐 하러 일찍 일어났나 싶을 때가 하루이틀이 아니다. 그렇게 새벽 시간을 보내면 하루 종일 자괴감이 느껴진다. 어제는 급기야 휴대폰 감옥을 검색했다.


김은경의 『습관의 말들』에서 인용한 미국 작가 그레첸 루빈의 정의에 의하면 세상에는 ‘포기형’과 ‘절제형’ 인간이 있다고 한다. 포기형 인간은 욕구 자체를 포기해 버리는 사람이고, 절제형 인간은 적당히 욕구를 충족해 가며 조절하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나는 미디어에 취약해서 학창 시절부터 텔레비전을 한 번 켜면 끌 수가 없었다. 결혼한 이후에는 아예 텔레비전을 사지 않았다. 포기형을 택했던 거다. 스마트폰이 나오면서 사정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스마트폰 앞에서는 욕구 포기가 쉽지 않다. 미국에서 여행할 때조차 꾸준히 쓰던 일기였건만 귀국 후 일상에 익숙해진 지금 나의 아침 시간을 스마트폰이 장악해 버렸다. 이젠 휴대폰이 터지지 않았던 미국 국립공원이 그리울 지경이다. 왜 한국은 어디서라도 휴대폰이 연결되는 걸까.


우리가 하는 것, 우리가 하기를 미루는 것, 우리가 언젠가 하기로 계획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정의한다. 우리가 왜 그 일을 하고 있거나 하지 않고 있는지 스스로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앤드로 산텔라, 『미루기의 천재들』


일기가 모여 책이 되는 걸 경험했다. 이 글을 발판 삼아 내일부터는 휴대폰을 감옥에 넣고 다시 아침 루틴을 정립해야겠다. 이제는 동화를 한 편 내놓을 수 있게 말이다. 욕망은 결핍에서 나온다고 한다. 사람은 부족한 것을 채우고 싶은 욕망이 있고, 그것을 채우는 과정에서 생기는 보상에 의해 행위가 반복되어 습관이 탄생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습관은 간절함에서 오는 것이다. 내가 사랑했던 아침 시간은 간절함의 결과였다. 그 간절했던 아침 시간이 책의 씨앗이었다. 그 보상으로 책을 출판했다.

아침의 습관이 하고 싶은 일들을 회피하던 내 생각을 변화시켰고, 지인에게 먼저 일기를 쓰자고 말하게 했고, 책을 쓸 용기를 주었다. 지금 아침 루틴이 무너진 나를 돌아보게 하고 휴대폰 감옥을 검색하게 하는 것도 내 아침 습관 덕분이다. 글을 쓰고 싶지만 너무 부족해서 지푸라기라도 잡듯 썼던 일기가 나를 만들고 있다. 내가 바라는 내 모습은 날마다 일정 시간 글을 쓰는 모습인 것 같다.

내 책 표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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