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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독자는 누구인가

<빠르지 않아도 괜찮아, 아이와 걷는 지금이 좋아>를 출간하기까지

by 니나

버지니아 울프는 “책을 읽는 법에 규칙은 없다. 올바른 방법도, 잘못된 방법도 없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폭 빠져서 정신없이 읽을 수 있었던 책들 덕분에 책 읽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알라딘 서점에서 연말이면 지역에서 얼마나 책을 많이 샀는지 알려주는데 상위 1%였다. 그 정도로 책을 많이 샀다니. 알바를 시작했을 때도 책 사는 비용을 내 힘으로 벌려고 시작한 거였으니 상위 1%에 빛나는 결과가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책을 읽는 것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도 즐기는 출판계의 빛과 소금이었다.


평생 책 읽는 걸 즐겼으니 ‘전문 독자’ 정도가 되어서 독자의 마음을 척척 알아맞히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성향의 독자는 이런 책을 좋아하고 저런 성향의 독자는 저런 걸 좋아한다는 걸 편집자처럼 알아맞히면 얼마나 좋을까. 막상 책을 쓰려고 앉으니, 눈에 보이지 않는 독자는 한 번도 사귀어본 적 없는, 미지의 존재였다.

20년 전쯤 동화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뭐라도 쓰기 시작했던 건 2년 전 미국에 살았을 때다. 딱히 만날 사람도 없고, 모임도 없고, 내가 가진 비자로는 일할 수도 없어서 시간이 남아돌았다. 뭐라도 하고 싶어서 한겨레 교육의 동화 작가 수업을 들었다.

‘독자는 이 이야기를 왜 읽어야 하나.’

동화 작가 수업에서 들었던 이 한마디가 머리를 때렸다. 이후로 무언가를 쓸 때마다 독자는 왜 이 이야기를 읽어야 할지 생각하고 있다. 도서관 책장에 가득한 책들, 매일 쏟아져 나오는 신문과 새로운 책들, 정보와 글자가 휘몰아치는 복잡하고 바쁜 이 세상에 내 글이 몇 분이라도 시간을 내서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글일까. 독자는 왜 내 이야기를 읽어야 할까.

돌이켜보면 편식 없이 그림책, 동화, SF, 판타지, 경제 서적, 에세이. 장르를 넘나들며 책을 읽는 나도 잔인한 독자다. 몰입감이 있거나 유용한 책들이어서 끝까지 읽었던 책도 많지만, 몇 페이지를 넘기다가 덮어버렸던 책들도 있었다. 작가가 오랜 시간을 갈아 넣어 썼던 책이지만 책장을 넘기거나 넘기지 않는 선택을 하는 건 나 같은 독자였다. 우리는 선망하는 작가를 우러러보기도 하지만, 독자는 더 큰 권력자였던 것!


몇 년 동안 일기를 써왔고, 그림책 동아리에서 에세이를 써왔다. 그림책 에세이를 쓰는 건 만만찮은 일이었다. 자주 들었던 피드백은 누가 읽을 것인지 명확하게 설정하고 글을 쓰라는 것이었다.

“자기 글은 수다쟁이의 글 같아. 글을 안 썼으면 그 생각들을 어디에 풀었을까.”

누군가의 피드백처럼 내 글은 내 일기의 연장에 불과한 수다스럽고 산만한 글이 되기 일쑤였다.

그림책 에세이는 2,500자 분량이었다. 그런데 책은 에세이의 50배 분량이었다. 책을 쓸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미국 여행을 준비하며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던 그 친구였다. 대상이 명확하니 글을 쓰기 조금 편해졌다. 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생각하며 글을 쓰기로 해서였다.

비클리 클리어리가 쓴 『헨쇼 선생님께』는 리 보츠라는 아이가 좋아하는 동화 작가 헨쇼 선생님에게 부모의 이혼과 낯선 학교에서 겪는 어려움을 편지로 쓰는 편지글 형식의 동화다. 리 보츠는 헨쇼 선생님에게 열 가지 질문이 담긴 답장을 받는데, 그 답장에 답하면서 차츰 글쓰기에 익숙해진다. 그 책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독자가 명확해지면 내 이야기를 더 이야기하듯 생략하는 것 없이 풀어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글을 쓸 때 나만 아는 것을 독자도 안다고 착각하고 생략해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독자가 명확하면 그런 실수를 줄일 수 있다.


사실 책을 써야지 결심했던 것도 그 친구 덕분이었다. 지인은 겨울방학에 아이들과 캐나다와 미국을 한 달간 여행한다며 뉴욕 여행 정보를 물어봤다. 미리 예약하면 좋은 곳, 미국 지하철 탑승 방법(지인은 일주일간 뉴욕에 머무르기 때문에 일주일간 오픈되어 있는 정액권을 쓰는 것이 좋다고 알려주었다), 지하철 티켓으로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통근 케이블카 타기, 팁을 어디서는 주고 어디서는 주지 않아도 되는지를 생각날 때마다 알려줬다.

미국에 살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가족과 국립공원을 트레킹할 때였다. 나는 그 친구가, 아니면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가족과 국립공원을 트레킹하길 바랐다. 그래서 우리 가족이 걸었던 트레일을 소개하며 내가 경험했던 일들을 에세이로 풀어내기로 결심했다.

독자는 누구일까. 초고를 쓰고 글을 수없이 퇴고하면서 나는 내 책을 읽을 가족과 친구들과 미국에 있는 지인들과 내가 만나진 못했지만, 우연히 내 책과 인연이 닿을 사람들을 떠올렸다. 글을 잘 쓰진 못하지만 적어도 내가 가진 것 내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퇴고해야지 날마다 생각했다.

내 책은 여행 에세이였기 때문에 ‘트레킹 여행을 가볼까?’ 솔깃해질 만한 경험담과 함께 친구와 미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줄 수 있는 알짜 정보들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이를테면 화장실과 경찰이 많이 출몰해서 미국 경찰에게 잡혔던 곳이 어디였는지, 그리고 어디서 일몰이나 일출을 보면 좋은지. 주유소가 많이 없는 곳은 어디였는지, 트레일의 역사나 지질학적인 정보도 간단하게 담으려고 노력했다.

『출판사에서 내 책 내는 법』이라는 책은 윌리엄 진서의 『글쓰기 생각쓰기』라는 책이 인용되어 있다. “독자의 마음에 어떤 점 하나를 남길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그러면 여러분이 어떤 길을 따라가야 할지 그리고 어떤 목적지에 도달해야 할지 더 잘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자기 만족을 위해서 책을 쓰기도 하지만 결국은 소통하고 싶어서 글을 쓰는 것은 아닐까. 혼자만의 독백이 아니라 책이라는 통로를 통해 내 책이 닿을 독자(핵심 독자, 혹은 확산 독자)와 소통하고 싶기 때문에 우리는 글을 쓴다.


내 책 표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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