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것들에 대해서
그림책 <나에게 정원이 있다면>을 읽고
내 책상은 쓸모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다지 쓰지 않는 색색의 스테들러 팬. 목탄과 붓펜, 길고 짧은 연필로 가득 찬 연필꽂이, 쓰다 남은 종이 쪼가리들, 도서관 회원증, 네임 스티커 무더기, 아이가 놀이터에서 놀다가 가져다준 네 잎 클로버. 이 정신없는 책상 위를 정리 좀 할까 싶어도 스테들러 팬은 가끔 친구와 전화통화하면서 낙서할 때 쓰면 색이 예뻐서 기분이 좋아지고, 근 6개월간 방치되어 있는 잘라 쓰고 남은 수채화 용지는 이렇게 두껍고 좋은 종이를 버리기 아까워 분명 쓸모가 있을 거라 생각하며 버리지 못했다. 어설프게 정리했다가 어디 두었는지 찾지 못했던 경험이 많다는 핑계로 그냥 책들 위에 대충 쌓아두었다. 도서관 회원증도 놓아둔 자리가 바로 자기 자리가 된지 오래다. 네임 스티커는 아이가 준 것인데 틈만 나면 ‘엄마, 내가 준 스티커 어디 있어? 버린 거 아니지?’ 하고 찾는다. 의심의 씨앗도 없앨 겸 그냥 잘 보이는 곳에 얹어두었다. 네 잎 클로버. 큰 아이가 뿌듯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엄마, 잘 보관해야 해.’하면서 줬다. 나름 애써서 찾은 모양이다. 조금 젖어 있어서 바로 책 속에 끼울 수 없었다. ‘물기 조금만 말리고 책 속에 넣을게.’ 하고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네잎클로버는 겨우 하루 지났는데 형체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바싹 말라 있었다. 아이는 무척 속상해했다. 그래도 소중히 책상 위에 두었다. 손만 대도 바스라 질 것 같아서 책 속에 끼울 수도 없었다.
내 일상도 쓸모없어 보이는 일들로 가득 차 있다. 아침 5시 20분쯤 일어난다. 세수하고 물을 마시면서 아무거나 읽는다. 최근에는 메이 샤튼의 <혼자 산다는 것>을 조금씩 읽거나 <글 쓰는 삶을 위한 일 년>을 읽고 있다. 읽다가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일기를 쓴다. 그 시간 동안 손글씨로 써왔던 일기는 다시 보고 싶지 않을 만큼 개발새발이다. 내용도 뒤죽박죽. 어쩌면 자기만족을 위해 이렇게 시간을 쓰는 건가 싶을 정도다. 차라리 '영어공부를 하면 머릿속에 뭐라도 남지. 이런 일기로 나무를 죽이는가!' 싶을 때도 있다. 황금 같은 새벽의 한 시간 정도를 이렇게 읽고 쓰고, 때로는 멍하니 앉아 딴생각을 하기도 한다. 이런 한량이 있나!
쓸모없는 것의 왕중왕은 집에 가득한 그림책일지도 모른다. 부피도 많이 나가고 무게도 무겁고, 가만히 보고 있으면 든든하지만 자주 꺼내 읽는 것도 아니다. 그림책이 너무 늘어나는 것이 부담스러워 일 년에 한두 번 정리를 하지만 정리한 후 갑자기 그 책이 필요할 때면 세상 아쉽다. 줄인다고 줄여도 옆으로 3칸, 위로 5줄인 책장이 그림책으로 가득 차 있다. 외서까지 더한다면 더 많은 양이다. 아이들은 이제 많이 자라 그림책을 그다지 읽지 않아 벽 한 면 가득한 책들은 오로지 나만의 컬렉션인 셈이다.
이런 나를 닮았는지 아이들 방에도 온갖 쓸모없는 물건들이 가득하다. ‘방 정리 좀 하자!’하고 들어가면 ‘엄마, 오지 마! 내가 할게!’ 한다. ‘정리 다 했어?’ 하면 이건 이래서 못 버리고 저건 저래서 못 버린단다. 내 책상을 떠올리면 딱히 할 말이 없어 넘어가기 일쑤여서 우리 집 책상 위는 책을 보는 공간이 아니라 물건을 쌓아두는 공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쌓아둔 물건 위에서 책도 읽고 일기도 쓰고 하고 싶은 건 다 하고는 있다.
본질찾기라는 이름으로 미니멀하게 최소한의 물건만 남기고 정리하는 삶이 한동안 유행이었다. 그 물결을 타고 나도 미니멀한 삶을 다짐하며 이것저것 정리해 보았다. 책에서 본 것처럼 텅 빈 방이 될 때까지 정리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삼 년 정도 안 입은 옷은 버리고, 종이들과 노트들을 정리한 정도였다. 나는 정리하면서 미니멀함이 본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본질의 정의는 사람마다 다른 것이고, 그것은 물건이 없는 미니멀함이 아닌 다른 것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미니멀을 외치며 이것저것 버렸고, 때론 버린 줄 모르고 찾는 일을 몇 번 반복했다. 지금은 물건을 사는 일에 더 신중해지기도 했지만, 버리는 일에도 더 신중해졌다. 버린 물건들 중 기억도 나지 않는 물건도 있지만 아차 싶은 물건도 많았기 때문이다. 쓰레기통으로 들어간 물건들은 왜 '쓸모없음'으로 분류된 걸까? 시간을 보낼 때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쓸모없음’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 시험공부하기 전에 쓸모없이 책상 정리를 시작하는 일은 쓸모없는 일일까? 본격적으로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유튜브를 보거나 드라마를 보며 잉여시간을 갖는 건 쓸모없는 시간일까?
나이가 들면서 보통 사람들 생각에는 ‘쓸모없어 보이는 일’을 열심히 하는 '참 덕후'들을 많이 만나게 됐다. 해도 돈이 되는 일도 아니고, 시간은 시간대로 엄청나게 드는 일들. 그림책을 만들거나, 아미가 되거나, LP판 마니아가 되거나, 요가를 열심히 하거나, 마라톤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그런 일들 말이다. 나는 그런 일들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감동을 받곤 한다.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는 소수의 사람들이다. 좋아하는 것을 힘껏 좋아하는 힘에 감동받는다.
때때로 나의 정원에서는 쓸모 있고 특이한 물건들이 돋아나기도 해요. 단추랑 우산이랑 오래된 녹슨 열쇠 같은 거요.
케빈 행크스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그림책 <나에게 정원이 있다면>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다.
나는 '단추랑 우산이랑 오래된 녹슨 열쇠 같은 거요.'를 한동안 잘못 읽었다. 쓸모없고 특이한 물건들로 말이다. 이 장면을 좋아한다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녔으면서도. ‘쓸모 있고’라고 제대로 읽었을 때 깜짝 놀랐다. 왜 ‘당연히’ 쓸모없고라고 생각했을까? 하고 말이다. 나도 모르게 단추랑 우산이랑 오래된 녹슨 열쇠 같은 물건은 쓸모없는 물건이라고 생각했던 거다. 우리 아이들 책상 위에도 단추랑 다이아몬드라고 우기는 플라스틱 조각, 조각난 송진 등 내가 보기에는 쓸모없는 물건들이 가득하다. 내가 그동안 쓸모없으니 버리라고 구박했던 물건들이 아이들에게는 얼마나 소중한 물건들이었을까. 끄적끄적 메모해 둔 종이 쪼가리들이 나에게 소중했듯이 말이다.
쓸모없는 물건으로 가득한 책상 위에서 일기장을 펼친다. 쓸모없는 행위들로 가득한 하루를 나만의 의미로 채우고 있다. 쓸모없는 것의 효용이다. 어쩌면 그런 물건들, 시간들이 진짜 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