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고 바라던 일이 내게도 일어났다.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이 끝나고, 대학 합격 소식을 들었다. 이제는 완벽히 이 거지 같은 집을 탈출할 수 있었다. 나는 행복한 마음으로 나의 완벽한 탈출을 준비했고, 돈을 벌기 위해 수능이 끝나자마자 화장품 공장과 인형 탈, 전단지 알바를 가리지 않고 모두 했다.
엄마는 입학하기 1주일 전 지방으로 함께 내려와 나의 대학교 근처 자취방을 구해주었다.
자취방을 구할 때 엄마는 크기며, 위치, 그리고 층수까지 걱정해 주며 방을 골라 주었는데 사실 나는 어디든 상관없었다. 집을 나온 것만으로 이미 그곳은 천국이었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원하는 적당한 나만의 첫 아지트가 생겼고, 이것저것 필요한 자취 용품을 다이소에서 채워 넣었다. 20살, 첫 나의 탈출이 성공 한 날이었다.
“응, 조심히 올라가.”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아무도 없는 작은 자취방에서 처음 혼자 잠을 자던 그날,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설레기도 두렵기도, 자유를 얻은 것이 실감 나지도 않았던 얼떨떨한 밤이었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발목에 있던 족쇄가 풀어지는 듯했다.
20살, 21살, 22살 3년간 나는 행복했다. 내 인생의 여느 시절보다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남들과 비슷하게 대학을 다니고, 누구의 방해 없이 꾸미고 술을 마시고, 친구를 사귀었다. 심지어 연애도 했다.
내가 탈출한 뒤로, 희생양을 잃은 가족에게는 컴퓨터 박사이자 양아치, 만능 심부름꾼, 착한 둘째 딸, 아빠의 사무보조가 사라졌다. 아무래도 가족들에게는 나의 빈자리가 컸던 모양이었다. 가족에게는 새로운 희생양이 필요했다.
결국 언니는 희생양이었던 나의 빈자리를 채우는 새로운 희생양이 되었다.
언니는 컴퓨터를 배웠고, 안 되는 엑셀을 하기 시작했으며 아빠의 밥을 차렸다. 그러나 한 번도 희생양이 되어본 적 없던 언니가 양의 역할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아빠와 언니는 자주 싸웠다고 했다. 그렇게 가족은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었다. 엄마는 내게 종종 전화해서 이 상황에 고통받고 있다며 푸념했다.
방학이 되면, 나는 다시 늑대의 희생양으로 돌아갔다. 아빠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밖에 나가 살잖아. 그니까 행복한 줄 알아.
언니는 내 것을 빼앗아 가는 것이 더 쉬워졌다.
밖에서 사는 행복한 내가 집에서 살아가는 불쌍한 자신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내가 좋아 보이는 물건이 생기거나 할 때면 아무렇지 않게 가져갔고, 잔심부름을 시키는 것도 거리낌 없어졌다. 발목에 보이지 않는 족쇄가 풀어진 줄 알았지만, 그저 늘어나 매달려 있었던 것뿐이었다.
가족들은 내가 방학이 되기를 고대한 것처럼 하루에도 수십 번 나의 이름 불러댔다. 그럼에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이 방학만 넘기면 다시 자유를 얻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