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직장에서 배운 교훈
대학 졸업 후 나의 첫 직장은 소위 'Big4'라고 불리는 4대 대형회계법인 중 한 곳이었다. 미국의 회계법인이 가장 바쁜 1월부터 4월까지를 '비지 시즌' (busy season)이라고 부르는데, 이때는 회사규정상 휴가를 낼 수 없다. 이를 '블랙아웃 피리어드' (blackout period)라고 한다. 매주 7-80시간의 고강도 업무를 소화한 첫 번째 비지시즌을 살아남고 나는 깨달았다. '회계법인에서 많이 배울 수는 있겠지만, 나의 체력으로는 평생 이걸 못 버티겠구나'라고.
갓 입사 2년 차가 되었을 때, 다시 학교에 돌아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입사하기 전부터도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고, 여기서 연차가 더 쌓이면 퇴사하기가 아쉬울 거 같았다. 미국 학교 시스템은 가을 학기가 시작이라, 학생들은 연말 전에 원서를 넣고, 연초에 면접을 보고, 2-3월에 결과를 받는다. 가을은 다행히 비지시즌이 아니어서 나는 주중에는 일을 하고 주말에는 원서 에세이를 쓰면서 대학원 준비를 했다. 그리고 두 번째 비지시즌이 돌아왔다.
대학원 진학 역시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나는 여러 대학에 원서를 제출했다. 한 곳이라도 면접 제안이 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많은 학교에서 인터뷰 연락이 왔다. 인터뷰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하는 것도 잠시, 엄청난 고민이 생겼다. 이 시절의 모든 면접은 대면이었기 때문에, 비행기로 면접 보는 학교까지 이동하는 시간을 생각하면 한 면접당 길게는 1박 2일을 할애해야 했다. 그러나 이때 나는 회사방침상 비지시즌에는 휴가를 낼 수 없었다. 게다가 팀의 막내였다. 면접 한 개 정도면 어떻게 꾀병을 부리면서 1박 2일 빠질 수도 있을 텐데, 매주마다 그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다고 회사한테 솔직히 말하자니, 이건 이직도 성공하기 전에 '나 다른 회사 면접 봅니다~'하고 공표하는 셈이다. 무엇보다 '솔직하게 말해도 회사가 안 된다고 하면 어떡하지?'가 제일 걱정이었다.
이때 내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은 가족밖에 없었다. 면접을 본다는 것을 숨기면서 비지시즌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아빠가 나에게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는 게 어떨까? 대학원 면접 때문에 며칠 회사에 못 나올 것 같다고."
"그렇게 말해도 회사가 지금 제일 바쁜 시기라 안된다고 하면 어떡하지?"
"그럼 회사를 그만두고 면접을 보러 가면 되지. 혹시라도 생활비가 모자라게 되면 말해. 아빠가 그 정도는 도와줄게."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소심했던 20대의 나는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한 가지의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엄청난 용기가 생겼다. 안된다면 회사를 그만두면 되는데, 부모님이 지지한다는데, 겁먹고 못 물어볼 이유가 뭐가 있는가.
다음날 내 선임에게 말했다. 대충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은데, 면접을 봐야 한다. 내가 맡은 일은 책임지고 끝낼 테니 앞으로 몇 주간 한 번씩 자리를 비울 수 있게 해 달라.' 같은 말을 (공손하게) 했던 것 같다. 이건 내 선임의 책임에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어서 결국 파트너한테까지 올라갔다. 결론은 'OK'사인이 났고, 덕분에 면접은 제 때 다 보고, 일은 비행기, 호텔, 주중, 주말 가릴 것 없이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래나 저래나 안된다고 했을 상사들은 아니었을 것 같지만, 회사를 그만 둘 각오의 마음이 없었더라면 그때의 나는 이렇게 당당하게 물어보지 못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시절보다 덜 소심해진 나는 생각한다. 진심으로 그만둘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의 마음은 상대방도 느낄 수 있다고.
이때를 계기로, 회사원이 회사와 협상할 때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협상이 안 되면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마음가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이는 가장 사용하기 어려운 무기라는 것도 배웠다. 주위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현재 회사와의 연봉 협상을 하기 위해 다른 회사의 오퍼를 받아 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는 '당신과 나의 뜻이 맞지 않으면, 난 다른 곳으로 떠날 겁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이다. 결국 이 무기를 사용하려는 목적이다.
다른 회사의 오퍼 외에도 '협상이 안 되면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마음가짐'을 갖게 도와주는 강력한 매개체는 '돈'이다. 당장 몇 달간의 생활을 버틸 수 있는 돈이 없는데, 어찌 그만두겠다는 마음가짐을 진심으로 가질 수 있겠는가. 20대의 나 또한 부모님의 든든한 응원이 없었으면 회사를 그만 둘 생각을 못했을 것 같다.
20대는 불확실성의 연속인 것 같다. 예상치 못하게 인생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는 이 시기에, 가진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볼 수 있게 용기를 주는 것이 바로 약간의 노잣돈이다. 그래서 학생들과 그들의 부모님이 금융교육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