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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로소피아 Feb 13. 2024

미국 시골 농장의 감성 가득한 밸런타인데이 디너

사랑에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미국의 밸런타인데이는 주로 남자가 자신의 연인을 위해 장미꽃을 사고 식당을 예약한다. 막중한 임무를 띈 남편이 밸런타인데이 전 주말에 우리 동네에 있는 한 농장에서 밸런타인데이 프라이빗 다이닝 이벤트를 한다고 가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이벤트 세부내용을 보니 동네에서 유명한 레스토랑의 셰프를 초청하고 농장에서 대부분의 재료를 제공하여 음식을 만든다고 하였다. 자연 안에서 프라이빗 다이닝을 하는 아이디어가 신선하게 느껴져서 남편에게 인터넷으로 얼른 예약을 하라고 했다.


디너 당일 아침부터 하늘이 "오늘은 나가서 화창한 날씨를 즐기세요~"라고 외치고 있었다. 이벤트 시작이 오후 3시부터여서 늦지 않게 집을 나섰다. 한 30분 정도 운전을 하니 커다란 오크나무들과 드넓은 잔디밭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 동네에 이런데가 있었어?"라는 말이 나오게 만드는 풍경이다. 농장 입구 쪽에 주차를 하고 걸어 들어가니 채소를 키우는 밭들과 모종을 보관하는 비닐하우스가 보였다.

하늘이 참 이뻤던 하루.

마트에 가면 'Free Range Eggs' (자연방사 계란)라고 라벨이 붙어있는 제품을 보는데 이곳에서 진정한 자연방사 닭들을 보았다. 울타리도 없는데 어째서 도망가지 않는지 아직도 미지수이다.

삼삼오오 모여있는 닭들.  드넓은 벌판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해진다.

조금 더 걸어가니 커다란 오크나무 아래에 길게 세팅되어 있는 디너 테이블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원하는 자리에 미리 받은 이름표를 올려놓았다. 테이블 건너편에는 라이브 밴드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평소에는 듣지 않는 컨트리 뮤직이지만 이 장소와 분위기에 참 잘 어울리는 선곡들이라고 생각했다.

80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긴 테이블.

이벤트는 오후 3시부터 시작이지만 저녁은 한참 후에 먹는다. 이런 디너 이벤트들은 보통 처음에 리셉션이 있다. 준비되어 있는 드링크 부스에서 원하는 음료수나 술을 주문해서 받고 자신의 연인뿐만 아니라 여기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도 노닥노닥 잡담을 나눈다. 팁 아닌 팁이라면 미국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스몰토크를 할 때는 "와 날씨 끝내주네요! (It's a beautiful day")나 "너도 여기 처음 와보는 거야? (Is this your first time to be at this farm?)" 같은 질문으로 시작하면 된다.

부스에는 커피, 티, 맥주, 와인, 스프릿츠 (Spritzer) 같은 다양한 음료들이 준비되어 있다. 뒤에 보이는 리얼 팜하우스.
한쪽에서는 저녁에 먹을 고기를 굽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벤치에 앉아서 쉬고 있다.

한 손에 음료를 들고 농장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 넓은 땅의 잔디를 어떻게 관리하나 했는데 여기서 키우는 양들이 자연정원사의 역할을 한다고 한다. 잔디를 먹어 치워 관리한다니! 소들도 많이 보였는데 어미소와 송아지가 함께 있는 광경이 참 따스하게 느껴졌다.

(좌)잔디 식사중인 양떼들. (우)어미소의 젖을 먹고 있는 아기소.

농장을 구경하고 한가롭게 쉬고 있다 보니 농장 주인부부가 나와서 손님들에게 오늘 와줘서 고맙다고 환영인사를 했다. 농사도 지으면서 본인의 농장을 이벤트 베뉴로도 사용할 생각을 하다니. 속으로 사업 수완이 참 좋은 부부라고 생각했다.

오크트리 아래에 모여서 농장부부가 하는 말을 듣는 사람들.

주인부부가 인사를 했다는 뜻은 이제 좀 있음 저녁이 시작될 것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슬슬 미리 맡아놓은 자리에 가서 앉아서 음식을 기다리니 애피타이저부터 음식이 서빙되기 시작했다. 테이블이 길게 세팅되어 있어서 자연스럽게 내 양옆에 있는 커플들과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한쪽은 강아지와 함께 사는 신혼부부, 다른 한쪽은 어린아이가 있는 30대 부부와 대학 간 자녀들이 있는 50대 부부였다. 어린아이가 있는 커플은 아이를 반나절 베이비시터에게 맡기고 데이트를 나온 듯하였다. 인생의 다양한 지점에 있는 사람들이 사랑을 위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인 것이 왠지 모르게 인상 깊었다.

(왼쪽부터) 클램 포테이토 수프, 버터 레터스 샐러드, 농장에서 제공하는 계란과 버섯으로 만든 디쉬. 계란 노른자가 신기하게 오렌지색이다.
(왼쪽부터) 메인디쉬로 돼지고기가 나왔는데 '양이랑 소는 손님들이 볼 수 있는 곳에 살아서 일부러 주지 않는 걸까?'라고 생각했다. 상큼했던 블루베리 마스카포네 디저트.

저녁을 먹다 보니 서서히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기온이 점점 내려가니 뒤편에 모닥불을 피우기 시작한다. 난 캠핑을 좋아하지 않는데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으니 '사람들이 이런 맛에 캠핑을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캉스가 아니라 팜(farm)캉스에 온 기분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8시가 넘었다. 3시에 농장에 도착했으니 벌써 5시간이 지난 셈이다. 엄청나게 긴 "저녁"이지만 솔직히 저녁은 핑계고 이런 이벤트는 커플들이 둘만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는 것에 그 목적이 있는 거 같다. 당연히 손님 중에 아이는 없다. 밸런타인데이는 젊은 연인의 날인 경우가 많은데 우리가 갔던 밸런타인 디너에는 노부부들도 참 많았다. 그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사랑은, 부부관계는 끊임없이 노력하는 거라고. 그런 의미에서 남편, 칭찬해!

 손을 잡고 걸어가는 부부의 뒷모습이 이뻐서 찍은 사진. Happy Valentine's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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