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에 몰아본다 ‘빈지워치’

by 롱쇼츠

시간적 물리적 제약이 사라지다


새로운 산업은 신조어를 만든다. 폭음과 폭식을 의미하는 빈지(Binge)와 본다는 뜻의 워치(Watch)가 결합된 ‘빈지 워치’는 단기간에 TV 프로그램 등 콘텐츠를 몰아서 보는 행위를 일컫는다. 왜 사람들은 영상 콘텐츠를 몰아보기 시작한 걸까?


OTT(Over The Top)은 인터넷을 통해 볼 수 있는 TV 서비스다. 넷플릭스가 대표적이다. 구독 경제의 핵심인 OTT는 넷플릭스를 선두로 새로운 경쟁자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매월 얼마의 구독료를 지불받는 방식의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고 있다. 고객은 구독료를 내고 OTT 내 콘텐츠를 모두 즐길 수 있다.


과거의 영상 콘텐츠 시청 습관을 돌이켜보자. 정해진 요일, 정해진 시간에 방영되는 인기 드라마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시간에 맞춰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드라마가 시작하기 앞서 연이어 나오는 광고를 봐야만 했다. 드라마의 인기가 높을수록 광고의 수도 많았다. 시청자의 시청 패턴은 콘텐츠에 메어있었다.


케이블 TV 시대가 도래하면서 사람들의 시간적 제약이 풀렸다. 다시보기 기능이 기본이 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시간에 얽매이지 않아도 됐다. 대신 사람들은 케이블 TV 이용료를 지불해야 했고, 일부 콘텐츠는 다시 별도로 결제해야만 했다. 무료와 구독, 그리고 건별 구매 등 여러 방식이 혼재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성향에 맞춰 상품을 결정하기도 했지만, 이른바 약정기간에 묶여 자신에게 최적화된 콘텐츠 소비를 할 수는 없었다.


넥플릭스는 가장 직관적인 형태의 비즈니스 모델을 선보이면서 미국의 케이블 TV 산업의 지배력을 빠르게 깎아내렸다. 매월 구독료를 내면 모든 콘텐츠를 볼 수 있다는 매력적인 방식이었다. 심지어 구독료는 케이블 TV보다 훨씬 쌌다. 콘텐츠의 량이 적다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넥플릭스는 큐레이션 기능에 집중했다. 사람들이 보기 원하는 콘텐츠를 우선 노출하고, 또 직접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OTT는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작동했기 때문에 공간적 제약도 무너뜨렸다. 시간적 그리고 공간적 제약이 사라지면서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저렴한 구독료로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Kingdom-1.jpg 넷플릭스의 인기 한국 드라마 '킹덤'


새로운 서비스에 따른 새로운 시청 문화


다시 ‘빈지 워치’로 돌아가 보자.


OTT는 시리즈물을 한꺼번에 공개하는 방식으로 마니아층을 포섭했다. 새로운 서비스는 새로운 소비문화를 만든다. 매번 다음 편을 기다렸던 과거의 시청자와 달리 이제 그들은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다. 하나의 시리즈가 완결될 때까지 기다리거나 완결된 완성도 높은 드라마를 시청하는 그들은 빠르게 선택하고 또 빠르게 포기한다. 콘텐츠가 흥미롭지 않아 졌다면 그들은 언제든지 이탈한다. 그 대상은 콘텐츠뿐만이 아니다. OTT도 마찬가지다.


OTT 중심의 콘텐츠 생태계가 형성되면서 여러 서비스는 더 좋은 콘텐츠를 확보하고 더 낮은 구독료를 책정하기 위한 경쟁에 돌입했다. 기존 TV 중심의 기업은 그야말로 위기 앞에 섰지만, 시청자는 기업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과실을 챙길 수 있게 됐다.


언제든 구독을 해제할 수 있도록 시청자 친화적 상품을 내놓는 OTT 덕분에 우리는 더 이상 볼 게 없는 OTT의 구독을 언제든 그만둔다. 그리고 다른 OTT로 갈아탄다. 이 같은 패턴을 통해 시청자는 최소의 비용으로 최고의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게 되었다.


개인에게 최적화된 콘텐츠를 제공하기 위해 온갖 기술을 동원하는 기업 덕분에 빈지 워치 현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빈지 워치의 후속 현상으로 구독을 해제했다가 재구독하는 ‘반복 현상’도 일반화되어 가고 있다.


넷플릭스는 정교한 콘텐츠 추천 알고리즘을 구축하고 있다. 넷플릭스 첫 화면엔 기가 막힐 정도로 내가 좋아하는 장르의 영화와 시리즈가 자리를 잡는다. 넷플릭스는 DVD를 대여하던 시기부터 이 알고리즘을 만들어왔다. 고객의 DVD 대여 목록을 분석한 것이다. 넷플릭스의 핵심 역량이 이 알고리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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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지 워치의 의미


시청자의 취향을 파악하고 적절한 콘텐츠를 선별하는 역량은 OTT의 기본이 되었다. 이제 너도나도 개인 맞춤형 콘텐츠를 제공한다고 홍보한다. 더 나아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잘 나갈’ 콘텐츠를 사전제작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러한 현상이 구독 비즈니스 모델에 시사하는 바는 크다. 구독 비즈니스 모델은 일회성 구매 패턴의 고객보다 충성 고객을 확보함으로써 안정적인 현금흐름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큰 강점이 있다. 그런데 고객은 언제든 쉽게 떠날 수 있으므로 기업은 압도적인 서비스를 만들어 독점적 혹은 독과점적인 지위를 획득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기업은 매우 저렴한 가격 혹은 압도적인 개인 맞춤형 서비스 혹은 매우 우수한 품질 중에 적어도 하나는 확실하게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소프트웨어와 콘텐츠에서 촉발된 구독 경제 비즈니스 모델은 오프라인에 퍼지고 있다. 면도기, 생리대, 책, 이불 등 일상생활용품은 대표적인 상품군이다. 이제 막 발을 띤 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에 기대 다수의 스타트업이 혁신을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대기업은 될성부른 아이템이 발견된다면 주저 없이 뛰어들 것이다. 그들은 오프라인 구독 경제의 근간이 되는 제품 생산능력과 유통망을 이미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스타트업의 속도와 대기업의 적응력 간의 경쟁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대기업에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건 오판이다. 넷플릭스가 성장하는 십여 년 간 미국의 케이블 TV 기업은 제대로 된 반격을 가하지 못했고, 달러 쉐이브 클럽이 면도기 시장 점유율을 한참 잠식한 이후에야 질레트 등 기존 대기업은 부랴부랴 대응책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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