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기는 남성의 필수품이다. 여성용 면도기 시장도 있지만, 남성용 면도기 시장의 크기는 압도적이다. P&S인텔리전스(P&S Intelligence)가 2020년 3월 발간한 ‘면도기 시장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면도기 시장의 매출 규모는 180억달러(21조4400억원)에 달한다. 그리고 이 시장은 2030년 225억달러(26조8000억원) 규모로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매년 2.1%씩 시장이 커진다는 이야기다.
이 거대한 면도기 시장은 글로벌 기업이 장악하고 있다. 왕복식(원통형) 전기면도기 시장에선 브라운과 파나소닉이, 회전식(디스크형) 전기면도기 시장에선 필립스가 각각 압도적인 시장 지위를 점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일반적인 면도기 타입은 습식 면도기로 구분된다. 면도 크림을 바르고 날카로운 날로 수염을 깎는 방식이다. 이 시장의 절대강자는 질레트다. 면도기 산업에서 질레트는 최고의 명성을 지니고 있다.
질레트의 역사는 무려 19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립자인 킹 C. 질레트는 안전 면도기 시장을 개척했다. 그가 안전 면도기를 최초로 발명한 것은 아니다. 다만 킹 질레트는 대량생산에 성공해 어마어마한 상업적인 성공을 일궈냈다. 판매 첫해 고작 50여 개가 팔렸지만, 그다음 해엔 무려 9만개의 면도기를 판매했다. 판매량은 다시 수십 만개에서 수백 만개로 급증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엔 미국 병사들에게 면도기를 납품하며 인지도를 높였다.
세계 면도기 시장 점유율 1위인 질레트는 특히 선진국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과감한 R&D 투자를 통해 우수한 절삭력과 함께 좋은 면도감과 밀착감을 제공하기 때문.
다만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단점은 비싼 가격이다. 시장 지배력을 지닌 질레트가 좋은 품질의 상품까지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전략이다.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는 질레트를 계속 찾았고, 질레트는 공격적인 마케팅 비용을 지불하면서 시장 지위를 지켜왔다.
비싼 면도기 가격이 부담스러웠던 것은 우리나라 소비자뿐만이 아니었다.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2011년 미국의 스타트업 달러 셰이브 클럽(Dollar Shave Club)이 면도기 구독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 스타트업은 질레트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의 면도날을 정기적으로 배송해준다. 특히 쇼핑을 위해 차까지 타고 나가야 하는 미국의 일상에서 정기배송은 획기적이었다. 달러 셰이브 클럽은 단기간 내에 온라인 면도기 시장에서 1위를 차지했다. 위기감을 느낀 질레트는 2017년 면도기 소비자 가격을 20% 인하하는 결정을 내렸다. 질레트 창사 115년만의 첫 가격인하였다.
우리나라에도 달러 셰이브 클럽을 벤치마킹한 스타트업이 등장했다. 수개의 스타트업이 도전했다가 현재 가장 큰 존재감을 보여주는 곳은 와이즐리(Wisely)다.
2018년 1월 와이즐리는 면도기 구독 서비스를 오픈했다. 김동욱 와이즐리 대표는 첫 서비스를 연 뒤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글로벌 기업 면도기 판매가에서 20%에서 30%가 유통비”라며 “중간 유통을 줄이면 소비자에게 싼 값으로 면도기를 팔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전했다.
와이즐리가 2018년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다. 김동욱 대표는 2016년 5월 스퀘어셰이브라는 브랜드를 만든 뒤 1년 동안 연구개발과 제조 파트너 물색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김 대표는 소비자 반응을 수집했다. 스퀘어셰이브는 와이즐리를 위한 베타버전이었던 셈이다.
김동욱 대표는 한국피앤지(P&G)에서 마케팅을, 베인앤컴퍼니에서 소비자 분야를 담당했다. 피앤지는 2005년 질레트를 인수했다. 김 대표는 한국피앤지에서 면도기의 비싼 가격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했고, 베인앤컴퍼니에서 사업적인 감각을 키웠다. 그는 피앤지 시절 동료인 전영표 이사와 구글코리아에서 마케팅과 영업 업무를 맡았던 김윤호 이사를 팀에 끌어들였다.
와이즐리는 면도의 본질인 절삭력에 집중했다. 기존 제품과 비슷한 품질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가격은 큰 폭으로 낮추는 게 와이즐리의 전략이었다. 즉, 좋은 제조 파트너를 찾는 게 매우 중요했다. 와이즐리는 독일 졸링겐으로 날아갔다. 졸링겐은 중세 시대부터 칼을 만든 ‘칼의 도시’다. 동남아에서 싼 가격에 면도날을 제조할 수도 있었지만, 품질은 와이즐리가 양보할 수 없는 요소였다. 와이즐리는 100년 동안 면도날만 만든 OEM 기업을 제조 파트너로 맞이하게 되었다. 이 OEM 기업은 월마트와 테스코 등 글로벌 유통사의 브랜드 제품(PB)을 만드는 곳이기도 하다. 그만큼 품질에 있어선 세계 정상급이다.
물론 신생 스타트업이 100년 전통의 OEM 기업과 한 번에 계약을 체결했을 리는 만무했다. 와이즐리는 이 기업에 첫 손짓을 한 지 2년 만에 결승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 사이에 와이즐리는 끊임없이 콜드메일(Cold e-mail)을 보냈다.
다음 단계는 마케팅이었다. 높은 품질과 저렴한 가격이 핵심 비즈니스 모델이었기 때문에 와이즐리는 유통 단계에서 비용을 대폭 낮춰야만 했다. 즉, 오프라인 판매는 선택지가 전혀 아니었다. 온라인을 통해 제품을 고객에게 선보여야 했던 와이즐리는 ‘고객 밀착 전략’을 택했다.
온라인도 유통 플랫폼을 통해 판매하기 위해선 10%에서 40% 정도의 수수료를 지불해야 했다. 와이즐리는 자체 사이트에서 제품을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대신 고객과의 적극적인 스킨십을 통해 유통 경로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와이즐리는 페이스북 등 SNS 피드에 달린 댓글에 모두 대댓글을 달았다. 회사로 걸려오는 전화에도 모두 응대했다. 응대 방식도 매뉴얼이 아닌 사람 대 사람 간 대화 방식을 택했다. 마치 가까운 사이가 된 느낌을 고객에게 준 것이다.
와이즐리는 고객의 소리를 더 가깝게 듣기 위해 기업이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도 썼다. 바로 고객 직접 방문이었다. 와이즐리는 사업 초기에 고객 백여 명의 집에 방문했다. 고객이 누구인지, 그들의 생활 패턴은 어떤지, 또 면도에 관해 어떤 점이 애로사항인지에 대해 파악한 와이즐리는 이 경험을 품질 개선으로 이었다. 좁은 화장실에 면도기가 녹슬지 않게 세면대에 걸쳐두는 것을 목격한 와이즐리는 제품의 등면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좀 더 편하게 면도기를 보관할 수 있도록 한 개선이었다.
서비스 첫 해에 와이즐리는 구독 서비스에 더해 단품 판매도 시작했다. 정기배송에 익숙하지 않은 고객이 단품 구매를 의뢰하거나 한 번 구매 후 구매 취소하는 사례가 발생했기 때문. 고객의 편의를 위해선 정기배송 모델만을 추구할 필요는 없었다.
오픈서베이가 2020년 3월에 낸 ‘남성 그루밍 트렌드 리포트 2020’에 따르면, 와이즐리는 면도 구독 서비스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물론 질레트의 날 면도기 시장에서의 이용률은 74.7%로 압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기는 하다. 여전히 가장 영향력 있는 브랜드는 질레트인 셈이다.
그럼에도 와이즐리의 성장은 두드러졌다. 특히 20대 남성 소비자의 와이즐리 이용률은 무려 10.3%를 기록했다. 30대와 40대의 3.9%와 3.7%가 와이즐리를 사용하는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와이즐리는 질레트, 고루코, 쉬크에 이어 전체 4위를 차지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5위가 노브랜드이니 결코 흘려볼 결과는 아니다. 1위부터 3위를 차지한 브랜드가 수십 년간 영업을 한 반면 와이즐리는 고작 3년 만에 4위를 차지했다.
앞서 언급했듯 소비자는 ‘면도기의 비싼 가격’을 면도 및 수염 관리 시 가장 불편한 점으로 꼽았다. 2040 남성 10명 중 6명은 하루 한 번 이상의 면도를 할 정도로 면도용품은 일상 소품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가격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남성 소비자는 그동안 대용량 패키지를 주로 구매했다. 평균 단가를 낮추기 위해서다.
면도기 주요 구매자가 엄마나 아내에서 직접 사용자인 남성으로 변하는 경향도 이 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남성에게 선택권이 주어지면서 가격 대비 성능은 더욱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와이즐리는 모두 다른 피부와 수염에 맞춘 구독 서비스로 진화하고 있다. 와이즐리는 간단한 퀴즈를 소비자에게 제시한다. 얼마나 자주 면도를 하는지, 어떤 피부 타입인지, 면도할 때 느끼는 불편함은 무엇인지를 소비자가 직접 답한다. 더불어 면도기 핸들 색상도 선택할 수 있다. 와이즐리는 이 같은 결괏값을 반영해 구독 패키지를 제안한다. 쉐이빙젤과 에프터쉐이브도 패키지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 상품을 쉽게 패키지에 뺄 수 있는 고객 친화적 UX도 구현하고 있다. 물론 각 제품을 별도도 구매하는 것도 가능하다.
달러 셰이브 클럽은 미국 시장을 장악했던 질레트의 시장 점유율을 70%대에서 50%대로 끌어내린 주역이었다. 유니레버는 2016년 달러 셰이브 클럽을 기업가치 10억달러(1조1000억원)에 인수했다. 단기간에 특정 산업에 이토록 큰 영향을 미친 스타트업은 그리 많지 않다.
와이즐리는 어떤 길을 걷게 될까?
강력한 구독 서비스의 힘을 경험한 질레트도 유사한 서비스를 내놨다. 퀴즈 방식으로 자신에게 맞는 제품으로 패키지를 구성한 뒤 정기배송을 받는 방식을 사용하는 질레트가 점유율 방어에 나선 것이다.
물론 경쟁사도 등장했다. 국내에는 와이즐리 외에도 레이지소사이어티와 이노쉐이브가 면도 구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레이지소사이어티는 세계 3대 면도기 기업인 프랑스의 BIC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
면도 구독 서비스 부문에선 상당히 앞서가는 와이즐리지만, 전체 시장을 기준으로 봤을 때는 아직 그 인지도가 압도적이지 않다. 다만 고객과의 밀착이 곧 열성 팬을 만든다는 것을 잘 이해한 와이즐리가 당분간은 이 시장에서 두각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나라에 고품질의 면도기를 만드는 기업과 면도기 전문 유통기업이 없다는 점은 와이즐리 등 스타트업에 긍정적인 요소다.
반면 질레트, 도루코, 쉬크 등 상위 그룹의 압도적인 기업 규모와 브랜드 인지도, 그리고 현금 동원력은 스타트업에게 언제나 위기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와이즐리는 2018년 알토스벤처스로부터 시리즈 A 투자를 유치했다. 미국과 한국 등에서 투자 활동을 하는 알토스벤처스는 쿠팡, 당근마켓, 하이퍼커넥트, 크몽, 크래프톤, 비바리퍼블리카 등 우리나라의 대표 스타트업을 발굴해 투자한 유명 벤처캐피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