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eeer Mar 24. 2020

남자 친구는 땅을 보고 걷는다

본격 남자 친구 칭찬하기 세 번째

  우리의 데이트의 마지막은 늘 산책으로 마무리된다. 이리저리 정신없었던 하루의 일과가 산책으로 정리되는 느낌이다. 그날 하루 있었던 일을 남자 친구와 조잘조잘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 하루가 좋기만 했던 것처럼 둘이 히죽거리며 걷게 된다. 

  

  남자 친구와 걷다 보면 사람이 걷는 것조차 이렇게 다를 수가 있구나 싶어 신기할 때가 있다. 나는 주로 정면을 보거나 내 시선 가까이의 것들을 보면서 걷는다. 이를테면 나무나 건물 같은 내 눈에 잘 띄는 것들을 보며 걷는다. 반면 남자 친구는 신기하게도 땅을 보며 걷는다. 땅에 있는 여러 가지들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땅에 있는 쓰레기들은 그의 중요한 관찰 대상 중 하나이다. 바닥에 버려진 물건들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다시 가던 길을 가곤 한다. 누군가 반쯤 먹은 음식들도 가끔씩 구경한다. 사실 나는 바닥 쪽은 내 관심 밖이라 그렇게 하는 남자 친구가 신기해 장난을 치곤 한다. "응. 먹는 거 아니야."


  나는 그에게 왜 땅을 보고 걷는지 물었다. 남자 친구는 멋쩍게 웃으며 별다른 이유는 없는데 어려서부터 그렇게 자주 놀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어렸을 때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을 다닌 적이 없었다고 했다. 부모님은 일하시느라 바쁘셨고 부모님이 일하러 나가시면 혼자 남아서 길에서 놀곤 했댔다. 자기 소유의 장난감은 당연히 없었고 친구들은 다 어디론가 가고 없는 길에서 그는 버려진 쓰레기들을 구경하고 그것들을 만져보고 그렇게 놀았다. 그러다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집에 챙겨가는 바람에 어머니께 한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렇게 놀면 안 심심했어?"

"심심했지. 그러니까 혼자 여러 가지 생각도 하고 외로웠고 그랬지."

  

  나는 바보같이 내 또래 친구들은 그 시절에 유치원에서 다니고 피아노 학원 다니고 태권도 학원을 다녔다고만 생각했다. 그런 게 당연한 줄 알았던 나의 세계가 좁고 편협함을 다시 깨달았다. 그의 얘기를 듣고 난 후부터 나는 동네 꼬마들과 중고등학생들을 유심히 보게 된다. 그때 남자 친구는 저 아이들 중에 어떤 아이랑 비슷한 아이였을까 상상해보곤 한다. 머리는 쟤랑 비슷한 스타일이었던 것 같아. 혼자 잘 노는 모습이 저 아이랑 비슷한 것 같아. 그런 상상을 자주 하지만 그와 딱 비슷한 사람은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그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과 있을 때면 그 사람의 기분이나 마음을 많이 생각하고 배려한다. 자기가 기진맥진해질 정도로.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그 사람의 힘든 일에 누구보다 먼저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학창 시절에도 평소엔 자기 공부만 하고 눈에 띄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누군갈 괴롭히는 애를 보면 맞을 걸 각오하고도 덤비곤 했다고 했다. 한 번은 친구를 괴롭히는 애가 있어서 자기가 먼저 덤비고는 다음 날 혹시 몰라 책가방에 아령을 들고 등교했다나. 좀 평범한 애는 아니다. 

  

  생각해보면 그가 지금과 같은 사람으로 성장한 데에는 땅을 보고 다녔던 어린 시절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혼자 쭈그리고 앉아서 외로워하며 누군가와 어울리고 싶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많이 고민했던 아이였기 때문에. 그런 아이가 엇나가지 않고 잘 커주어 고맙게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짠한 마음이 든다. 


  내가 길에서 그 아이를 만나게 된다면  문방구에 데려가서 "갖고 싶은 거 다 골라."라고 위풍당당하게 외쳐야지. 그러면 걘 막 신나서 뭐 고를지 엄청 고민하겠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