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선 류래웅 선생님
모든 인터뷰를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으라면, 류래웅 선생님으로부터 책을 선물 받던 순간입니다. 긴 인터뷰를 마치고 선생님께서는 가족들의 부축받아 안방 침대에 누우셨습니다. 그리고 어깨를 사용하셔서 힘겹게 서명을 해주셨습니다. 힘이 들어 보이셔서 하나만 해주셔도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여섯 권 모두에 서명을 해주셨습니다. 그때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그 시간이 아주 느리게 여겨졌습니다. 멈춘 시간, 비어 있는 공간에 놓여있는 기분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는 진정한 자신을 만나게 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어떤 부름을 받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서 끝까지 공부하겠다는 약속을 마음 깊숙이 새겼던 시간이었습니다. 나와의 약속이기도 하고, 선생님께 드리는 약속인 다짐이었습니다.
명리학을 공부하는 사람 중에 학선 류래웅 선생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연배가 있으시기도 하고 그 삶의 행적이나 일화가 대단하기도 하여 범접할 수 없는 분인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선생님께 인터뷰를 요청하는 전화를 드릴 때는, 박청화 선생님과 창광 선생님 그리고 백민 선생님과 인터뷰에 대한 허락을 얻고, 구체적 내용에 대해 논의하던 때였습니다. 여러 선생님께 허락을 얻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자신감이 생겼나 봅니다.
류래웅 선생님의 사무실로 무턱대고 전화를 해보았습니다. 선생님과 통화는 아주 짧게 이루어졌습니다. 인터뷰를 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었는데, 백민 선생님께서 허락하셨다면 더 알아볼 필요도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해보자고 하셨습니다. 내가 사는 지역이 부산인지 아시고는, 울산에 갈 일이 생길 테니 인터뷰 날짜는 천천히 잡아보자고 하셨습니다. 전화를 끊고는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통화 이후 선생님께서 4월 울산 강연회에 초청해 주시는 연락을 주셨습니다. 코엑스에서 열린 강연회는 선생님 개원 51주년 기념을 겸하는 행사였습니다. 그 강연회에서 선생님을 처음 뵐 수 있었습니다. 기문둔갑에 대한 강의가 있었습니다. 연이어 명리 등 다양한 주제의 역학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뜻깊은 날 선생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내가 뵈었던 대부분 선생님은 오랜 시간 강의를 들으며 익숙해진 분들이기도 하였고, 상담을 통해 나에 대해 이해하시는 분들이셨습니다. 그런데 류래웅 선생님과는 사전 상담도 하지 않았고,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눈 시간도 아주 짧았기 때문에 인터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막막하였습니다.
인터넷 카페인 <고려 기문학회>를 통해 선생님 글들을 읽고, 그 철학적 견해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또 선생님과 어떤 주제로 대화를 이어 나갈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인터뷰에 대한 대략적 콘티를 작성해서 보내드리고도 암담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을 뵙기 직전까지 계속해서 선생님에 대한 정보를 검색해 보고 알아보았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선생님과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내가 괜한 걱정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선생님과 대화하는 내내 행복했습니다. 무엇보다 선생님의 유머 감각은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선생님과 따뜻한 가족분들의 배려로 마음 편하게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가족분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얼마나 많이 웃었던지 배가 아플 지경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린 시절의 사고로 소아마비로 평생을 살아오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선생님과 함께 있는 내도록 선생님이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가족분들이 자연스럽게 손발이 되어주신 이유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선생님께서 너무나 큰 어른으로 계시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몸이 불편하다는 사실을 인지한 것은 나에게 책을 선물하시던 시간에서였습니다. 손으로 글을 쓰시는 일이 어렵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저서나 출판물이 많으시고, 학문적으로 다양한 활동을 해 오셨기 때문에 컴퓨터를 사용하시거나 필기하시는 일에 어려움이 있으실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글을 쓰시는 선생님의 모습은 공기처럼 가벼웠고, 자유로움이 넘쳐흘렀습니다. 선생님께서 어깨를 이용하셔서 글을 적어 내려가시는 동안, 여러 단어가 머릿속에 스쳤다가 사라졌습니다. 공기, 물, 바람, 별, 땅, 얼음, 사람, 영혼, 삶, 행복, 슬픔, 아픔, 기쁨, 환희, 권력, 돈, 사랑, 명예, 건강, 진리, 진실, 공부, 존경, 학문, 몰입, 노력. …
그 어떤 단어로도 그때 내가 느낀 어떤 이해를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나마 가장 어울리는 단어를 꼽자면 ‘자유’입니다. 그 순간의 시간과 공간은 공기처럼 가벼웠고, 자유로움이 넘쳐흘렀습니다.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 그날의 감동과 다짐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제이선생님) 학선 류래웅 선생님과 말씀 나눠보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973년 '오행원'을 개원하셨습니다. 1998년 '고려기문학회'를 만드셨고, 2000년에 '태을출판사'를 설립하셨습니다. 2003년부터 2012년 사이에 공주대학교 대학원 역리학과와 동양학과에서 기문둔갑 강의를 하셨습니다. 2013년 '명과학 연구'라는 학술지 발행하셨습니다. 현재 고려기문학회 회장이시고, 태을출판사 대표이시고, 오행 철학원과 네쌍스 작명 센터 대표이시고 ‘월간 역학’ 고문이십니다. 제가 소개해야 할 부분들이 너무 많은데, 일단 여기까지 선생님 약력을 소개해 보았습니다.
(류래웅 선생님) 그냥 오래 살다 보니, 이것저것 하다 보니, 앞에 이상한 것들이 붙었습니다. 네. 자. 그러면... 하루한장명리 유튜브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명리학의 한국 최고 방송을 운영하시는 송민정 선생님을 격려하는 차원에서 인터뷰에 응하게 되었습니다. 궁금하신 것 물어보시면, 아는 데 한해 성실하게 응답해 드리겠습니다. (웃음)
(제이선생님) 아... 선생님. 갑자기 그렇게 칭찬해 주시니 너무나 당황스럽습니다. (웃음) 선생님, <월간 역학>이라는 책이 있던데요. 제가 역학을 공부하기 전에도 도서관에 가면 간행물 코너에 꽂혀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월간 역학이 올해 34주년을 맞이했다고 들었습니다. 2023년 7월 표지 모델로 선생님께서 나오셨습니다. '되돌아본다, 역술 인생'이라는 이야기로 글을 게재해 주셨던데, 제가 선생님 뵙는 이 시기도 7월이고 해서 너무 좋은 것 같습니다.
울산에서 강연하실 때 초대해 주셔서 뵈러 갔었는데, 많은 사람이 와서 강연에 참석하고 선생님 51주년을 축하해 드리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선생님 제자분들 참 많으시지요?
(류래웅 선생님) 글쎄 수십 년 동안 했으니까. 이런저런 인연으로 제자들도 있습니다. 학교에서도 11년 동안 강의했으니 후배도 있고 제자도 있고, 뭐 그렇습니다. 제가 72세가 조금 넘었는데 다른 분들보다는 역술에 일찍 입문했기 때문에 경력이 좀 오래됐어요. 그러다 보니, 이렇게 저렇게 인맥이 많이 얽혀 있습니다.
(제이선생님) 울산 강연회에 많은 사람이 모여 선생님께서 50년 동안 역학에 힘쓰신 것을 축하하는 것을 보니, 참 보기 좋았습니다. 이번 월간 역학에 쓰신 글 잘 읽었습니다. '예언' 부분에 관해 이 자리에서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류래웅 선생님) 우리 아버님이 상당히 늦은 나이에 저를 낳으셔서 마음이 좋으셨던 모양이에요. 제가 태어난 다음 날 출생신고를 하러 가다가 길바닥에 점을 보는 사람을 만나게 되셨어요. 그분한테 제 이름하고 뭐 생년월일을 대니까, 잘 키우면 장관 자리 하나는 할 수 있는 팔자라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세 살 때 죽거나 아니면 장애를 입을 수 있으니 잘 키우라고 말했다 그래요. 일어서서 가려는데 ‘만약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장애를 가지게 되면 역학을 공부하게 하시오’라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세 살 때 언덕에서 굴러가지고 소아마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5살쯤 됐을 때 친척분을 통해서 알게 된 분 밑에서 이 년 반 역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제이선생님) ‘백두 노인’이라는 분에게서 공부하신 이야기군요. 역학(易學) 중에서 명리(命理)를 먼저 접하셨습니까?
(류래웅 선생님) 그분은 종합적으로 이것저것 다 했어요. 주역이나 육효, 방술 역학을 많이 하셨지요. 그런데 공부에 대한 갈증이 더 커졌습니다. 어느 날 신문을 보았는데 김계홍 선생님께서 대면이 아니라 통신으로 교육하신다는 광고가 났길래 알아보았어요. 그때부터 김계홍 선생님께 공부를 시작했어요. 전문역술인 될 마음이 처음에는 없었어요. 신춘문예 투고하고 떨어지고, 글을 좀 썼지요. 또 우리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그동안 배웠던 역학을 가지고 역술을 업으로 시작하게 되었지요. 2~3년만 해야지 했는데, 50년이 넘게 하고 있네.
(제이선생님) 1973년 오행원 개원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렇게 시작하신 게 50년 이상 되셨다는 말씀이시네요. 선생님께서는 기문둔갑, 풍수지리, 명리 등 역학의 다양한 영역에서 두루 공부를 섭렵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류래웅선생님) '기을임(奇乙壬) 삼수(三數)'라고, 기문(奇門), 태을(太乙), 육임(六壬)의 세 가지 역학(易學)을 다루면 신선의 경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 기문(奇門), 태을(太乙), 육임(六壬) 하는 분이 많지는 않아요. 많이 퍼진 것은 명리(命理)지요. 하는 사람도 많고 고수도 꽤 많습니다. 저도 명리(命理) 책을 두 권 썼습니다. 그런데 출판 목적으로 쓴 건 아니에요. 강의 자료들을 정리하여 출판한 것이라 제대로 손질을 못 하여 문맥이 조금 거칩니다.
(제이선생님) 다양한 출판물들 있으신데요. 명리 관련해서 <사주 실록> 등이 있으시고, 기문둔갑이나 풍수 관련 책도 있으시지요?
(류래웅 선생님) <기문둔갑 신수결>은 일 년 운세를 기문둔갑으로 집중적으로 보는 겁니다. 알고 보면 기문둔갑이 명리보다 더 쉽습니다. <기문둔갑 건곤대법>은 제목을 너무 거창하게 했어요. 폼 좀 내보려고. 또, <주택 풍수 보감>이라는 책이 있어요. 흩어져 있는 자료를 모아서 손질하고, 실험해 보고 만든 책이에요.
기문둔갑은 공부 초기 단계만 지나가면 쉽습니다. 명리가 훨씬 어렵습니다. 들어갈 때 웃고 들어가서, 나올 때 울고 나오는 학문이 사실은 명리학이에요. 기문이나 자미두수는 들어갈 때 우는 것 같지만, 나올 땐 더 웃어요. 역학(易學)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학문적인 것, 술수적인 것, 그리고 도가 있습니다. 내 생각에 명리는 도(道)에 가깝습니다.
(제이선생님) 역학 공부는 정말 매력적인 것 같습니다. 기을임(奇乙壬) 삼수(三數)에 능하신 선생님께서는 정재계(政財界)의 인사들을 포함한 다양한 사람들을 상담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50년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상담했다고 얘기하시면서, 권력이 있든 없든, 부가 있든 없든, 주제들은 한결같다고 하셨습니다. 실제 상담에 도움 될만한 이야기, 상담 사례 등에 대해 이야기 들어 보고 싶습니다.
(류래웅 선생님) 긴 세월 상담했으니, 기억에 남는 것이 많죠. 그런데 일일이 너무 곱씹으면, 제가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웬만하면 상담은 잊어버리도록 노력합니다. 상담할 때, 한 사람의 큰 줄기를 볼 때는 명리학이 우수합니다. 그때그때의 순간적인 판단을 할 때는 육효가 신묘한 점이 있습니다. 명리는 망원경입니다. 멀리 보는 거예요. 멀리 넓게 보는 것. 육효는 현미경이에요. 정밀하게 보지요. 기문둔갑은 중간 정도이지요.
(제이선생님) 선생님. 기문둔갑, 육효가 명리 공부보다 쉽다고 하셨지요?
(류래웅 선생님) 정말 더 쉽습니다. 오행만 알면 금방 배웁니다. 대신에 육효는 점의 영역이에요. 그래서 자기 마음이 불안정하거나, 스스로 믿지 않으면서 점을 치면 안 맞습니다. 자기부터 믿어야 해요. 자기가 마음이 청정해야 점이 맞아요. 그래서 제가 젊어서 친 육효는 신통방통했는데, 나이 먹어서 치는 육효는 잘 안 맞아요. 사람 너무 많이 만나고 술을 너무 먹어서 그런지...
(제이선생님) 마음도 수양하고 해야 한다는 말씀이시지요?
(류래웅 선생님) 그렇지요. 마음이 맑아야 해요. 기문이나 명리학은 시간이 갈수록 더 잘할 수 있어요. 경험이 쌓이니 그럴 수밖에요. 그런데 육효는 경험보다 기운이 중요합니다. 경건한 마음이 있어야 하지요. 경험하고는 좀 다른 문제예요.
(제이선생님) 선생님 이야기해 주신 사례 중에 자민련 창단과 관련한 일례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큰 사안에 대해 확신하시면서 이야기하시는 것은 육효로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류래웅 선생님) 자민련을 창당하신 분이 김종필이지요. 당시 대단한 권한을 갖고 있던 사람이에요. 그 사람의 일진이 중요합니다. 배에서 선장이 운이 나쁘면 배가 전복당하잖아요. 29일 원래 창당하기로 한 날 그 양반 일진이 나쁘더라고요. 다음날은 반대로 좋다고 이야기했지요. 그래서 창당 행사를 하루 미뤘어요. 그런데 29일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어요. 다음날은 쾌청했고요. 이 일을 계기로 이쪽 관계되는 분들을 거의 다 만났지요.
(제이선생님) 종합적으로 판단하신 것이 잘 맞았던 것 같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또 다양한 분들과 인연이 되셨나 봅니다. 이번에는 공부에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랜 세월 공부해도 사주가 잘 안 보이거든요.
(류래웅 선생님) 어느 정도 공부 수준에 도달하기까지는 자기 주변 사람들 사주는 보면 안 됩니다. 주변 사람의 사주로 연구할 때 어떤 문제가 생기냐면, 보통 80%의 사람들이 좋게 보고 싶어 해요. 이렇게 생각을 자꾸 굳히면서 삐딱선을 타게 돼요. 그래서 공부가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기 전에는 주변 친한 사람 사주 가지고 연구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 뒤죽박죽 돼요. 자기와 좋은 감정 또는 악감정이 있는 사람들 것은 공부하면 안 되고요.
일단 연해자평, 명리정종, 삼명통회, 궁통보감, 적천수(적천수 징의, 적천수 천미, 적천수 보주, 적천수 집요), 자평진전, 명리약언. 이런 글을 열심히 보셔야 합니다. 여기 있는 명조를 열심히 연구하셔야 해요. 물론 그 책들에도 잘못된 부분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맞는 게 더 많겠지요. 적천수 천미 같은 데는 500개가 넘는 사례가 나와요. 그런 걸 가지고 공부하셔야지 자꾸 주변 사람들 사주를 가지고 연구하면 안 됩니다.
(제이선생님) 나와 관계되지 않은 사주를 계속 보라고 조언해 주시는 것이네요.
(류래웅 선생님) 그렇지요. 4단 운동선수가 깡패와 만나서 맞고 왔어요. 운동선수는 격식에 맞춰서 훈련을 해왔겠지만, 전투 경험이 있는 깡패와 붙었을 때 게임이 안 되지요. 명리도 그래요. 이론만 아무리 잘 알아도 소용없어요. 그리고 경력이 50년 됐다, 이런 것도 자랑할 필요 없어요. 손님한테 한 마디라도 틀리면 그다음부터는 지옥이에요. (웃음)
(제이선생님) 실전에 강해야 한다는 말씀이시지요?
(류래웅 선생님) 제 제자 한 사람이 이름을 붙여줬어요. ‘자평 명리학’ 이런 것처럼, 저에게는 ‘맞춤 명리학’이라고 이름 지워줬어요. 맞춰야 해요. 무조건.
(제이선생님)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상담하실 때 철칙이나 원칙 같은 것 있으실까요?
(류래웅 선생님) 기본적인 판단은 해줘야겠지요. 그분도 먼 데서 와서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합니다. 하지만, 기본적 이야기도 어느 정도 선에서 끝내야 합니다. 말이 많아지면 실수를 하게 되기도 해요. 그렇게 되면 먼저 잘 판단한 것도 묻혀버려요. 프로의 입장에서는요, 맞춘 것이 고객 뇌리에 팍 하고 꽂혀야 해요. 똑같이 맞춰도 각인이 탁 되어야 해요.
(제이선생님) 선생님만의 맞춤 명리로 50년 세월 동안, 많은 사람이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고, 감사한 경험 하셨을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깨달음과 깨우침을 얻어가서, 그것을 바탕으로 삶을 꾸려나가고 이어간 것 같습니다.
(류래웅 선생님) 많이 들어줘야 합니다. 그 사람의 아픈 사연을 들어주고 공감해 주고 그래야 합니다. 예언이나 이런 건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제이선생님) 선생님께서는 공주대학교 대학원 역리학과와 동양학과에서 10년 이상 대학원생들 지도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역리학과나 동양학과는 어떤 공부를 하는 곳인지 궁금합니다.
(류래웅 선생님) 공주대학교에서 처음에 역리학과(易理學科)가 만들어졌어요. 그 명칭 때문인지 박사 과정이 개설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학과 명칭을 동양학과로 개칭한 것입니다. 2003년 무렵, 학과 개설에 대해 논의가 있었어요. 그러면서 커리큘럼을 짰지요. 역리학과이니 역학과 관련된 것으로만 커리큘럼을 짰었어요. 그랬더니 그 학과를 반대하는 교수들이 많았어요.
국립대학에서 무슨 미신 학과를 만드냐고. 그래서 초창기 때는 영어나 다른 교양 과목을 많이 넣어서 겨우 만들었지요. 저는 기문둔갑 과목을 10년 동안 한 번도 안 빠지고 강의했지요. 그러다 보니 박사 된 사람도 있고. 내가 뒤로 물러나야 배출된 사람들이 강의 자리가 하나라도 생길 것 같아서 그만뒀어요.
(제이선생님) 지금도 기문둔갑이나 역학 과목들이 국립대 커리큘럼에 들어가기 쉬운 일이 아닐 텐데, 10년 전에 이런 교육과정으로 국립대학에 학과가 생겼다는 것이 대단하게 여겨집니다.
(류래웅 선생님) 제도권 대학 안에 역학과가 있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어요. 참, 몽골의 국립대학교에는 역학과가 있었습니다. 세계 최초지요. 제가 몽골 역학 교재를 가지고 있거든요. 몽골을 제외하고는 없어요. 일본, 중국, 대만도. 일본 역술인들이 굉장히 부러워합니다. 자기네 나라에서는 아직 못 하거든요. 우리나라는 학교에 생겼지, 석사 배출하고, 박사 나오고 하니까 굉장히 부러워합니다. 역학은 현재 우리가 세계 최선진국입니다.
(제이선생님) 선생님과 여러 선생님께서 엄청나게 노력하시고 끌어 주신 덕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흩어져 있던 이런 공부를 모아서 제도권으로 연결해 주시기까지 엄청난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 감사한 마음이 절로 생깁니다.
(제이선생님) 선생님께서는 명리학이 어떤 식의 발전을 해나가게 되리라 생각하시는지요?
(류래웅 선생님) 직업 적성, 건강 적성 이런 식으로 항목을 구체화해서 명리 상담하는 분들이 늘고 있어요. 앞으로 운명 상담은 그런대로 또 유지되겠지만, 주제별로 발전할 것 같습니다. 분야별로 나눠질 것 같습니다. 궁합 전문이라든지. 진로 전문이라든지. 다양화가 될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주역을 달달 외웠어요. 그 시대 사람들은 다 점을 할 줄 알았어요. 난중일기를 보시면 이순신 장군이 점친 이야기도 많아요. 징비록의 류성룡도 한의학에 박학했습니다. 한의학은 역학과 쌍둥이 학문이니 그분도 역학에 능통하셨겠지요.
지금 여러 가지 발전 방향으로 보았을 때, 전 국민의 역학자, 역학을 교양으로 알게 되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는 운전하는 것이 고도의 기술이었죠. 근데 지금은 너도나도 다 운전하잖아요.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제이선생님) 인문학의 한 분야로 명리학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역학이 널리 알려져서 긍정적으로 쓰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류래웅 선생님) 그렇지요. 이것이 긍정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쓸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니, 누군가가 중심축을 잘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제이선생님) 월간 역학에 쓰신 글의 마지막 부분에 '이제 정리 못한 학문을 정립해야겠다.' 이런 문장이 있었는데요.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으십니까?
(류래웅 선생님) 책을 두 권 정도는 더 집필할 것 같고요. 체력이 허락하면 세 권 정도. 명리 서적을 반 정도 집필할 것이 있고, 기문둔갑에서 국운을 보는 부분만 따로 집필하고 있는 것은 거의 다 되어가고 있습니다.
(제이선생님) 선생님하고 상담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런 얘기들을 많이 하던데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실 수 있는 선생님의 시선이나 노하우를 들어 보고 싶습니다. 명조를 대하실 때 가지시는 마음가짐이 있으실까요?
(류래웅 선생님) 제삼자에게 팔자가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는 것은 굉장히 신중해야 합니다. 자신이 대단한 실력이 아닐 수 있고 틀릴 수 있는 소지가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극단적으로 불안한 이야기를 해서 상대를 겁주는 행위는 정말로 삼가야 합니다. 이게 구업이지요. ‘정구업진원(淨口業眞言)’이라는 불교 용어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지나치게 상대의 비위를 맞춰도 안 됩니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똑같은 금액으로 상담하는데, 사람을 다르게 대하면 안 돼요.
명리학을 공부하는데 이것을 직업으로 할지 안 할지는 물론 선택이겠지요. 이것을 직업으로 선택하시는 분들께 해 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직업으로 선택하셨다면 예언자의 길과 상담가의 길이 있습니다. 예언자는 냉혹할 만큼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는 것이겠지요. 죽은 다음에 이름을 남기시려면 예언자의 길을 가세요. 죽은 다음에 아주 유명해집니다. 부디, 상담가의 길을 가시기를 바랍니다.
(제이선생님) 상담하러 오는 사람이 누구이든 그 질문의 범위는 한정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류래웅 선생님) 질문하는 내용은 너무 빤하죠. 스무 가지가 넘지 않아요. 자식 문제, 사업 문제, 애정 문제 등. 육임이라는 학문에 과식이 720개가 있습니다. 720개의 과식 안에 인간의 물음이 모두 들어가 있지요. 복잡한 듯 보이지만 인간의 감정은 요약됩니다.
(제이선생님) 마지막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선생님의 마음에 관한, 좀 몽글몽글한 이야기 나눠보고 싶습니다.
(류래웅 선생님) 명리학자가 됐든, 한의사가 됐든, 축구 선수가 됐든 사람 마음은 다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꼭 명리학자만이 다른 행동을 하거나 다를 필요는 없지요. 인간은 일단 기본적으로 ‘윤리(倫理)’ 안에 있습니다. '홀로 있어도 근신한다', 중용에 나오는 말입니다. 누가 보지 않는 곳에서도 자기 행동이 올곧아야 진짜 덕이 있는 사람이 되겠지요. 그리고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자기 안에 꽃향기를 품도록 해야지요.
그리고 부탁하신 것은 아니지만 제가 마지막으로 시를 하나 읽어보겠습니다. 조선시대 때 구봉 송익필이라는 분의 <낙천>이라는 시(詩)입니다. 천명(天命), 그러니까 운명이 즐겁다는 것이지요. ‘운명을 즐겁게 받아들여라.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여라.’ 이것이 요지인 것 같아요.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惟天至仁(유천지인) 오직 하늘은 지극히 어질고
天本無私(천본무사) 하늘은 본래 사사로움이 없어서
順天者安(순천자안) 하늘을 따르는 자는 편안하고
逆天者危(역천자위) 하늘을 거스르는 자는 위태롭네
痾癢福祿(아양복록) 고질병과 복록은
莫非天理(막비천리) 천리 아닌 것이 없으니
憂是小人(우시소인) 근심하는 자는 소인이요
樂是君子(낙시군자) 즐기는 자는 군자이네
君子有樂(군자유락) 군자는 즐김이 있어
不愧屋漏(불괴옥루) 집이 새더라도 부끄러워하지 않네
修身以俟(수신이사) 몸을 닦고서 기다리니
不貳不夭(불이불요) 잘못을 반복하지 않고 아첨하지도 않는다네
我無加損(아무가손) 나에게 더할 것도 덜 것도 없는데
天豈厚薄(천기후박) 하늘이 어찌 후하고 박하게 대하겠는가?
存誠樂天(존성락천) 성심(誠心)을 보존하고 천명(天命)을 즐긴다면
俯仰無怍(부앙무작) 내 행동에 부끄러워할 것 없을 것이네
(제이선생님) ‘낙천’ 정말 멋진 시입니다. 직접 읽어주시니 마음이 따뜻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