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명리
2022년에는 고3 담임을 하면서 방학을 이용하여 선생님들을 뵈러 다녔습니다. 2023년에는 간단한 수술을 하기도 하였고,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조금 살만하다 싶으면 선생님들을 뵈러 다녔습니다. 인터뷰를 하자고 해놓고 나의 무심함으로 뵈러 가지 못하게 된 선생님도 계시고, 정말 뵙고 싶은 선생님들이 많이 계시지만 요청을 드리지 못하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명리학에 중독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명리학을 공부하는 일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배울 만한 부분이 있겠다 싶으면 온라인 강의를 신청하거나 배움을 얻으러 찾아갔습니다. 오랜 시간과 많은 돈을 쓰고도 나에게 득이 되지 않았던 수업이 있는가 하면, 무료 강의만으로도 무릎을 치게 하는 수업도 있었습니다.
이 공부에는 순서와 절차가 있습니다. 또 세월이 녹여내는 깊이가 있습니다. 명리학의 기초 단계를 어느 정도 익혔다면, 20년 이상 상담과 교육을 병행하신 선생님들의 말씀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학문과 실전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검증의 시간을 거치신 선생님들의 이야기는 삶에 대한 통찰이 진하게 녹아있습니다. 명리학의 가치와 효용에 관한 선생님들의 철학은 이 학문의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만듭니다.
나는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훌륭하신 선생님들을 뵙고 말씀을 청하고, 배움을 얻는 시간이 허락되었습니다. 가방을 싸고, 기차를 타고, 길을 걷는 일이 힘들지 않았습니다. 여름이 덥지 않았고, 겨울이 춥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지 곰곰 생각해 보니 내가 이 공부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왜 이 공부를 사랑하는지를 곰곰 생각해 보니 늘 새롭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공부는 새롭습니다. 이 세상 모든 개체가 다른 것처럼 사주팔자 여덟 글자가 펼쳐내는 사람과 삶에 관한 이야기는 무궁무진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색깔들이 몇 개인지 헤아릴 수 없듯이, 이 공부가 이야기하는 관계성을 모두 다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화풍정 선생님께서 ‘이제는 창조하는 명리를 해보십시오’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 말이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기존의 이론을 익히기도 힘든데 무슨 창조를 한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이제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습니다. 음양오행의 기본적 체계와 생극제화, 형충회합파해의 개념, 육신과 격국, 십이운성과 십이신살 등 중요한 맥락을 익혔다면 그다음은 창조의 명리입니다.
내가 만난 선생님들이 각자의 개성으로 명리를 다루는 모습에서 예술가와 같은 면모를 볼 수 있었습니다. 명리 공부는 뛰어난 관찰력과 분석력을 바탕으로 창조를 도모해 냅니다. 결국 '나'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하여 나만의 세계관과 윤리관, 철학을 다져나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기본적인 개념을 익힌 사람이라면 사주를 풀어내는 방법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사주를 두고 그것에 대한 해석은 역학자의 수만큼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풀이의 방법은 유사하나 설명은 달라집니다. 똑같은 사람의 사주라도 그것을 상담하는 사람의 세계관, 윤리관, 철학에 따라 그 설명이 달라진다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같은 사주 풀이를 두고 내담자를 따끔하게 혼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공감을 바탕으로 길을 찾게끔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례로 미래가 보인다는 어떤 분을 사회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명리 공부를 하신 분도 아닌데, 큰 결정을 앞둔 나에게 ‘네 뜻대로 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며 힘줘서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근거 없는 무책임한 말은 타인을 깊은 수렁에 빠트립니다. 근거 있는 말이라도 말에는 항상 책임이 따릅니다.
창조의 명리란 그럴싸한 이론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타인을 돕는 한마디를 할 수 있는 지혜를 겸비하는 일이 창조의 명리입니다. ‘창조의 명리’라는 것은 기본 개념으로 단단하게 중심을 세운 다음 자신의 세계관, 윤리관, 철학을 알아가는 가운데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사람과 세상에 호기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공부하고 성찰하며 통섭하는 시간을 살아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의 근본을 알면, 만 가지를 추론할 수 있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바닷물을 마셔보지 않아도 바닷물이 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음양오행이라는 하나의 근본을 바탕으로 사람과 삶과 자연의 순환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근본을 중심에 둔 선생님들의 창조는 하나의 예술이며 아름다운 도(道)의 길 안에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다시, 멀리보다
한동안 나는 이 공부에 자신감을 잃고 있었습니다. 또 내 삶의 방향성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2024년 1월. 화풍정 선생님을 2년 만에 다시 뵈었습니다. <멀리보다>라는 선생님 사무실 문 앞의 문구는 선생님과 헤어진 이후에도 계속해서 나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그날 선생님을 뵌 일은 내 인생을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박사 과정에 입학하고, 명예퇴직을 실행하기까지 이 길이 맞는가에 대하여 끊임없이 반문하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자꾸 뒤돌아보며 일을 그르치지 말라, 소금기둥 만들지 말라는 선생님의 조언을 여러 번 되뇌었습니다.
길과 흉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의 선택은 또 다른 길을 펼쳐냅니다. 삶이라는 긴 시간 안에서 우리는 무수히 많은 것들을 선택합니다. 선택의 누적이 내 삶의 방향성을 만들어 가고, 그 안에서 우리는 좌절이나 희망을 발견합니다. 방향성을 찾지 못한 채 자신감을 잃었던 나는 새로운 길에 접어들고 나서야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비로소 멀리 보는 것이 가능해진 것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이 공부에 자신감을 잃었던 이유는 나만의 철학과 세계관이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연월일시는 자연의 코드임과 동시에 사람이 만들어 놓은 글자에 불과합니다. 글자를 단순한 원리와 원칙으로 해석하는 것은 인공지능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주팔자의 글자는 역학자의 세계관이라는 필터를 거쳐 설명되고 상담을 통해 활용됩니다.
내가 만난 선생님들은 작게는 20년부터 많게는 50년 이상 이 공부와 함께 하신 분들입니다. 그분들의 말은 각자의 윤리관과 철학, 세계관의 필터를 통과하여 나에게 전해졌습니다. 선생님들을 가까이에서 뵙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다양한 시선과 시각, 세세한 감정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좋다'라고 말하는 부나 권력을 좇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단지 이 공부가 좋아서 공부를 위한 공부를 해오신 분들이었습니다. 이 공부는 자연에 관한 공부이고, 사람에 관한 공부이고, 관계에 관한 공부이고, 스스로에 관한 공부입니다.
오랜 세월 자신이 궁리하는 것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부족한 자료를 모으고, 밤을 새워 토론하고, 공부하고, 강의하고, 상담하는 세월을 사신 선생님들을 만나면서 깊은 감동이 전해졌습니다. 진심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에 매진하고 몰입하는 삶을 선택한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감동이었습니다. 매진하며 몰입하는 삶의 가운데 세계관과 철학은 깊어지고 풍성해질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어떠한 운명의 길을 걸어오셨나요. 또 어떠한 운명의 길을 걸어가실까요. 과거가 어떻든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미래가 어떻든 잘못될 일이 없습니다. 지금 내가 존재하는 이 시간과 공간에서 우리는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멀리 보며, 한 발 한 발 나아가면 되지 않을까요? 자신을 응원하고 서로를 격려할 수 있는 이 공부는 알면 알수록 매력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