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아니다, 그건 아니다. 회사에서는 매일 같이 업무 메일을 썼으니까. 전화기를 들고 말로 하기보다는 글로 적어 내려가는 게 더 좋았다. 분쟁의 소지가 있을 때 이미 사라져 버린 말보다는 메일에 남아있는 글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도 있지만, backspace가 글에서만 적용되는 게 가장 컸다. 단어의 적합성과 상대방에게 조금이라도 책잡히지 않기 위한 문장들을 backspace와 함께 채워나갔다.
업무할 때만 눌렀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글을 써 내려갈 때 걸림돌은 엄격한 자기검열이었다.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나의 글들은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기준'이라고는 썼지만 정작 명확한 기준은 없었다. 남의 글과의 비교가 오히려 더 적절한 단어인 것 같다. 마무리 지어지지 않은 글들이 여기저기 쌓여갔지만 나는 끝끝내 꺼내놓지 못했다. Backspace와 Delete 이 두 개가 글들의 저승사자들이었다. 세상에 태어나지 못하고 조용히 파묻히는 길로 인도하는 죽음의 사자.
글을 써본 사람은 알겠지만, 글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쓰고자 하는 욕구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마음 한편에는 언제나 무언가를 쓰고자 하는 열망이 남아있다. 열망의 불씨를 사그라트리는 것은 다름 아닌 '내 글 구려병'이다. 가볍게 무시해 줘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된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작가들은 저 병에 안 걸렸을까 싶다가도, 풍문을 헤집다 보면 마냥 그렇지만은 아닌 것 같아 아주 작은 위로가 되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잠시뿐일 위안은 지독한 병을 퇴치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렇담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다. 공생 방법 터득하기.
뭐, 별거 없다. backspace가 아니라 자음과 모음을 끊임없이 누르며 글자를 직조해 내면 된다. 다시,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무엇을 써야 할까, 하는 고민 속에서 어느 날 소설책 한 권이 나를 붙잡았다. 오른쪽 페이지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도저히 다음 장을 넘기지 않고서는 베길 수 없을 정도의 궁금증을 유발한 사람. 읽는 것만큼이나 쓰는 것을 하고 싶었던 나에게 불을 제대로 지펴주었다. 손에 쥐어진 부싯돌 2개로 뭐를 할지는 이제 나에게 달려있다.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으니, 그 책을 시작으로 써보기로 했다. 일종의 <취향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종이책>에 관하여, <공간>에 대하여,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에 대해 채워나갈 글집이다. 어렵게 시작하지 않으려 한다. 항상 많은 계획과 준비를 하고 시작한 일은 끝맺음이 신통치 않았다. 일단 지르고 보는 대범한 성격이면 좋으련만, 그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준비만 하세월이다.
오랜 준비는 하지 않았다. 완전히 생날 것의 글이라고는 할 순 없지만 퇴고의 시간이 여유롭다 한들 절대 100%의 만족은 없음을 머리로는 이해하기에, 퇴고만 하다가 글을 저승으로 보내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으려 한다.
일종의 한계 뛰어넘기 프로젝트이자, 나의 소소한 취향의 공유집이다. 이 글을 읽고 누군가가 쓰기에 도전한다면, backspace 앞에 무너지지 않고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면 좋겠다. 내가 한 권의 책에서 시작했던 것처럼.
*본문 및 표지에 사용된 사진은 모두 pixabay에서 다운로드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