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취향에 관하여 Ep.3
이삿날이 잡혔다.
고양이와 함께 살면서 어느덧 고양이 짐과 사람 짐의 비중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게 되었다. 내 짐 중에 가장 큰 부피와 존재감을 드러내는 건 책이었다. 몇 년 전 이 집에 이사 올 때도 정말 많이 버리고 왔는데, 또다시 책이 한가득이었다.
중간중간 조금씩 정리를 했음에도 여전히 책장을 가득 채웠고, 좁은 집에 책장을 더 들일 수 없게 되자, 책을 세로로 세워놓은 그 위에다가 가로로 눕혀서 보관하기까지 했다. 한 집에 오랫동안 머무르면 나도 모르는 새에 짐이 엄청나게 불어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이사를 하는 게 불필요한 짐을 만들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이라는 글을 봤었다.
미니멀라이프를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처분하기 가장 어려운 물건 중에 하나로 빠지지 않는 게 바로 책이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 이사를 앞둔 시점에서 가장 먼저, 가장 쉽게, 하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어렵게 정리한 물건이 바로 종이책이었다. 한 권 두 권씩 살 때는 몰랐는데 어느덧 책장을 가득 채워가고 있었으니까.
책을 깨끗하게 보는 스타일도 아니다 보니 중고 서점에 되팔 수도 없었다. 깨끗한 책은 아예 손을 대지 않은 책들이 많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책들은 또 출간된 지 10년이 훌쩍 넘은 책들이라 이 또한 중고 책 매입으로는 가치가 떨어졌다. 살 때는 제값 주고 비싸게 준 책인데, 어느 순간 애물단지 취급을 하고 있다니.
오래된 전공 서적을 버리고, 사놓고 읽지 않은 책, 도저히 읽히지 않아 중도 포기한 책을 책장에서 빼냈다. 책이 많을 때는 손쉽게 골라냈는데 책들이 차츰차츰 줄어들면서 판단하는 게 어려워졌다. '딱 10권만 더 빼내 보자.'라고 다짐을 하고 나름의 월드컵을 치렀다. 책들 입장에서는 일종의 '생존 월드컵'이었다. 토너먼트 경쟁에서 떨어진 책들은 바닥으로 밀려났다. 남편이 물었다.
"책을 왜 이렇게 많이 버려?"
"버려야 또 사지."
다른 물건은 정리를 하고 나면 이젠 좀 덜 사야지,라는 결심을 하지만 책은 그렇지 못하다. 참 희한하지. 새로운 책은 끊임없이 나오고, 읽고 싶은 책도 읽어야 할 책도 많은 세상이다.
내게 책은 어쩔 수 없이 지속적으로 사고, 또 그만큼 처분해야 하는 존재이다. 사지 않을 결심 따위는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나마 전자책이 많아지고, 또 전자책 구독 서비스도 다양해져 모든 책을 좁디좁은 책장 안에 두지 않아도 되는 게 다행이다.
요즘엔 형광펜 대신 책을 깨끗하게 보기 위한 다양한 문구용품들이 출시되었고 나도 몇 개 사서 써봤지만, 번거로운 일이었다. 형광펜으로 속 편히 주-욱 줄을 긋고 쓰고 싶은 말이 있으면 편하게 쓰는 게 좋았다. 일일이 투명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쓰는 건 번거로웠다. 이게 내 책을 중고 시장에 되팔 수 없는 이유이며, 또 내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는 것을 꺼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부디 나 자신에게 다짐하고 또 바라는 것은, 책을 사는 행위에 집중하지 말기. 책이 장식품으로 전락하지 않기를, 책의 기능을 다하기를 바란다. 사지 않을 결심 따윈 없으니, 잘 읽어낼 결심이 있기를.
이사를 하면 핸드폰 카메라 화면에 모두 담길 작은 크기의 책장으로 사야겠다. 정해진 기간마다 책장 사진을 찍어야지. 어떤 책이 있는지, 어떤 분야에 관심이 있는지 한눈에 보일 테니까. 나중에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사진으로 보는 내 지난날의 모습이랄까. 재미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