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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Aug 12. 2024

다시 시작하는 일은, 아주 작은 것에서 출발하곤 한다.

나의 취향에 관하여 Ep.1

                       

 시작은 딱 두 문장이었다.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다음 이 시간에 계속>이라는 자막 한 줄을 보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던 때가 있었다. 어떤 때는 전혀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결말에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뱉으며, 어떤 때는 남녀 두 주인공이 엇갈리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바라며, 또 어떤 때는 제발 죽이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다가, 살려내라고 협박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기도 했었다. 그들은 허구의 세상에 사는 허구의 인물일 뿐인데도 말이다.

      

드라마를 안 본 지 너무 오래되어서 절절함을 잊고 살았는데 얼마 전에 읽은 책 덕분에 호기심이 다시 살아났다. 편집자님의 탁월한 편집능력이었는지, 작가님의 의도적인 문장 조절의 결과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드라마 '절단 신공' 같은 절묘한, 딱 두 문장이었다.     



붕어싸이코는 어디서부터 설명할지 난감해하다가 물었다.

- 김기태 作,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중 <로나의 별> p199 의 마지막 문장.      


"떡국은 먹었니?"

- 위의 책,  p200 의 첫 문장.    

 

'아니, 이게 이 상황에서 할 질문이야?'라는 의아함과 '아니, 이게 이렇게 신선할 일이야?'라는 놀라움이 동시에 찾아왔다.      



앞의 내용을 좀 더 살펴보자면 이렇다.      


판매가는 천만원으로 책정되어 있었고, 설명은 "천만원짜리 기타"가 전부였다. 붕어싸이코는 즉시 판매자인 빵또아에게 연락했다. 사십 분 뒤 근처 근린공원의 시소 옆에서 두 사람은 만났다. 빵또아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 위의 책, p199     


여기까지가 앞 내용이다. 붕어싸이코는 빵또아를 중고 거래 앱으로 처음 만났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대의 모습에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는 떡국을 먹었냐는 질문을 한 것이다. (이 둘이 만난 날은 1월 1일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과 천만원 사이의 괴리감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고, 그 상황에서 던진 질문이 지나치게 한국인다워서 웃음이 났다. ‘밥’ 대신 ‘떡국’이 들어간 문장은 큰 의미는 없는 인사치레의 말일 수도 있지만, 또 아주 따뜻한 말이기도 할 테니까.     

이런 허를 찌르는 상황을 설정하다니, 정말 대단해! 감탄을 곁들이며 200쪽과 199쪽을 옮겨 다녔다.  


  


종이책이어서 가능했었다

내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온 것은 오른쪽의 마지막 문장과 왼쪽의 첫 문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숫자가 바뀌는 물리적인 위치, 아주 잠시지만 눈으로 들어오는 글자가 멈추어버린 시간, 짧은 순간의 전율이었다.

모든 게 가능했던 이유는, 전자책이 아니라 종이책이었기 때문이었다.


손에 느껴지는 약간은 꺼끌한 종이 표면의 감촉, 너무 얇지 않은 적당한 두께, 무엇보다 가장 좋은 것은 종이의 냄새였다. 신문처럼 마르지 않은 잉크의 냄새 말고, 한결 산뜻한 나무 냄새같은 종이의 냄새가 좋았다. 책마다 손에 잡히는 느낌이 다르고, 종이의 재질도 다르다. 재질이 다르니 종이 색도 다르다. 책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지만 정작 구성품은 제각각이다.


@pixabay



종이책을 좋아하지만 무조건 고집하지는 않는다. 실물로 존재하는 책을 보관할 공간이 있어야 하는데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후에 적겠지만 나는 미니멀라이프를 꿈꾸는 초보인데, 책은 살 때보다 처분할 때가 훨씬 큰 문제였다. 도서관도 방법이지만 책을 깨끗하게 보는 편은 아니라 잘 이용하지는 않는다. 여러 이유로 웬만하면 전자책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은 전자책을 선택하지만 특별하거나 특이한 이유로 종이책을 찾는 경우도 잦았다.


내가 이 책을 종이책으로 읽은 건 정말 다행이었고, 잘한 일이었다. 조금씩 쓰고자 하는 욕구는 쌓여왔지만 행동으로 옮길만한 계기가 부족했던 상황에서, 종이 한 장을 넘기며 겪었던 느낌은 글을 쓰고자 하는 마음에 불을 충분히 지펴주었다. 아마 전자책으로 읽었다면 터치 한 번으로 가볍게 넘어가는 다음 장에 숨 고르기를 할 틈이 없었을 것이고, 또 종이책과의 배열이 다른 전자책을 고려했을 때 내가 멈추었던 그 포인트에서 전환이 있었을지 알 수 없다.


다행히 종이책이었기에 모든 것이 완벽하게 나의 눈길을 붙잡았고 놓아주지 않았다.

가볍게 넘길 수 있지만 한번은 멈추게 만드는 것이 작가의 능력치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마지막을 다시 처음으로 바꿀 수 있게 하는 힘을 갖고 싶단 욕망이, 다시 글의 세계로 불러들였다. 강력한 자기장에 이끌리듯 나는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자음과 모음으로 내 생각을 고스란히 담아내기 위해서.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는 일은, 예상치 못했던 아주 작은 순간에서 시작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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