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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Aug 15. 2024

여름휴가, 선베드에서 책을 읽기로 했다

나의 취향에 관하여 Ep.2 


여름휴가 때 읽을 책을 급히 주문했다. 

수영장 선베드에 누워 가볍게 읽을만한 책, 덜렁거리는 나의 성격을 고려했을 때 물에 빠뜨릴 수도, 바닥에 떨굴 수도, 그마저도 아니라면 젖은 몸에서 물방울이 요란스럽게 떨어질 수도 있으므로 값비싼 아이패드는 위험해. 2만 원 미만의 종이책으로 하자. 


구독하는 전자책 서비스로는 다양한 책을 볼 수 있으니 굳이 애써 고르고 고르는 절차가 필요 없다는 장점이 있지만, 단 한 번의 부주의함으로 산산조각이 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핸드폰의 작은 화면으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선베드의 친구는 모름지기 종이책이 되어야 했다. 


종이책은 물에 젖어도 말리면 되고, 마르면서 남긴 물자국 또한 나중에 그 책을 다시 꺼내어봤을 때 오늘의 일을 기억할 만한 흔적일 테니 잠시 잠깐 여름날을 떠올릴 수 있을 테고, 혹시라도 떨어뜨려 모퉁이 한 곳이 찌그러져도 일그러진 모퉁이를 펴면 되고, 방수 가방에 쏙 들어가는 작은 크기에 무게도 가벼워 휴대성이 좋다.

 

무엇보다 최고는 선베드에 놓고서 수영하고 돌아왔을 때 치안이 좋기로 유명한 우리나라에서 물건을 잃어버리기란 쉽지 않지만, 혹여 누군가가 나의 책을 탐내해서 가져간다고 한들 엄청난 상실감과 본전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며, 덧붙여 그 안에 담긴 나의 온갖 자료와 비밀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 얼마나 효율성 최고, 가성비 최고의 도구란 말인가! 


@pixabay 


고르고 고른 책은 조예은 작가의 <적산가옥의 유령>이었다. 

목표했던 대로, 책의 원래 쓰임에 맞춰 나는 선베드에 누워 책장을 넘겼고 물방울 한두 방울을 두꺼운 종이 위에 떨어뜨리기도 했으며 읽던 책을 가볍게 뒤집은 채로 잠시 물속을 떠다니다가 돌아오곤 했다. 진도는 빠르게 나가지 않았지만 미세하게 늘어난 책의 갈래들이 조금씩 쌓여가면서 읽어 넘긴 종잇장의 수가  읽어 넘겨야 할 종잇장의 수를 넘어서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책 속의 주인공들을 만났다가 잠시 단잠에 빠져들었다가,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신나게 울려 퍼지는 EDM과 신나는 팝송의 가사들이 뒤섞여 잠을 자는 듯, 정신 일부는 깨어있는 듯, 현실과 단절된 그 어딘가를 부유하듯, 그렇게 나의 휴가는 끝이 났다. 


@pixabay 


나는 숙소에서 운영 중인 서점에 들러, 또다시 종이로 된 책을 구매했다. 예쁜 표지에 이끌렸는데, 잡지류이다 보니 비닐로 포장이 되어있어 어떤 글과 사진이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마치 럭키박스를 뽑듯이, 제일 마음에 드는 표지를 골랐다. 서점에서 럭키박스라니, 너무 새롭잖아?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던 공간, 예쁜 소품들을 전시한 공간의 물건을, 나는 집으로 가져왔다. 나중에 이 잡지를 보며 뜨거웠던 여름을 기억해 보려고.

여름날의 냄새, 일일이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리듬감만큼은 신나게 내 귓가를 타고 들어왔던 그날의 공기가 종이 한장 한장에 고스란히 배어있었다. 

또 한 번의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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