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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의수박 Sep 01. 2018

파쇄하러 출근하는 주말 아침

열심히 또 갈아봅니다, 서류뭉탱이.  

아침에 일어났더니 비가 온다. 비 예보가 있었나..잠시 생각하는 틈에 천둥번개가 치더니 빗줄기가 거세졌다.

비 내리는 토요일 아침, 이라며 감상에 젖을 틈을 안준다. 이놈의 날씨. 열어둔 창문을 황급히 닫고 고민에 빠졌다. 아 출근을 해야 하나...


곧 퇴사를 앞두고 그 어느때보다 바빠졌다. 인수인계 자료를 만들어야 하고, 그간 묵혀뒀던 파일정리를 해야 하고, 사무실에 산처럼 쌓인 서류뭉탱이를 없애야 한다..그래. 없앤다는 표현보다 더 정확한 건 없다. 출력물로 서류를 보는 게 좋아, 메모한 것이 아까워, 언제고 찾아볼까 싶어 차곡차곡 쌓아뒀던 자료들이 내 발등을 찍는다.


물리적 시간을 고려해봐도, 도저히 다음주 내에 내 모든 흔적을 없애긴 힘들다.

"별 수 있나. 그래, 출근해보자."

출근해보자, 마음을 먹고도 한참을 밍기적거리며 요즘 읽고 있는 이경미 감독의 에세이 <잘 돼가! 무엇이든?>를 마저 읽었다. 이럴 땐 더 재미있다. 


주말이라 아무도 없을 것 같아, 대충 세수만 하고 모자를 눌러쓰고 나왔다.

이런 날은 차도 멀리 있다. 어젯밤 집 앞 주차할 곳이 없어 공용주차장에 세워둔 나를 반성하며... 

회사에 도착하고 보니 당황스럽다. 주말인데... 같은 층의 다른 회사들은 모두 출근한 모양이다. (세상에. 주말에 출근한 동지들이 이렇게 많다니ㅠ....) 주차장은 여느 평일과 마찬가지로, 좋은 자리는 모두 빠진 후였다. 


아무튼, 출근했다. 

장하다 나놈!!


우리 사무실에 다행히 아무도 없다. 자. 어떤 서류부터 없애줄까...

내 책상에 한 뭉텅이,  혼자 널찍하게 쓰던 책장에도 한뭉텅이 두뭉텅이 세뭉....(세는 게 의미없네...)

책상 위 자료부터, 파쇄할 자료와 재활용할 종이로 구분했다. 그리고 열심히 갈았다.

오늘 안에 다 끝날까 싶지만, 어쨌든. 이렇게 하나씩 정리를 해간다. 

인수인계 자료를 정리하다보니, 소처럼 일도 많이 했구나 싶어 씁쓸하기도 하고, 언제 다 하나 싶어 화도 났다가, 그래도 남은 우리 팀원들을 위해 잘 정리해주자고 마음을 다독여본다.


이런 일은 익숙해지지 않다. 하긴, 몇 번이나 퇴사해봤다고 익숙해지겠나.

퇴사하며 가장 힘든 순간은 퇴사하겠다고 명확하게 회사에 뜻을 전달하고, 일정을 확정 받는 것. 그리고 지금처럼 나의 흔적을 하나씩 없애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오늘은 집에 가며 책상 위에 올려든 내 개인짐들도 챙겨야겠다. 일본에 사온 귀여운 고양이 기념품, 파티션에 붙혀둔 좋아하는 작가들의 엽서작품,  살아보겠다고 꾸역꾸역 챙겨먹던 영양제, 미스트, 개인 화장품, 책들... 집 다음으로 가장 독립적인 공간이던 내 책상은 그렇게 나를 닮아있다. 


에잇. 이렇게 감성에 젖을 때가 아냐.

다시 또 힘내서 열심히 갈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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