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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의수박 Aug 25. 2018

네. 결국 퇴사합니다.

행복하지 않는 일상, 스톱.

살던 곳을 떠나며, 새로운 지역으로 거처를 옮기며 나는 결심했다.


#소처럼 일하지 말 것.

#부러 애쓰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현재에 충실할 것.

#아직 오지 않은, 막연한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지 말 것.


그렇게 굳게 결심하고 시작했건만, 나는 여전히 일개미처럼 살았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싶지만, 결국은 또 양껏 욕심내고 잘하고 싶어 나를 갉아먹으며 애를 쓴다.

이렇게 살아도 될까, 마음이 자꾸만 말을 걸기 시작한 건 작년부터 였다.

잦은 외근과 야근, 주말 업무로 인해 과부하 상태였고, 감정노동의 정점을 찍었다.

실무자라는 이유로, 감정쓰레기통이라도 된 마냥, 모두 나에게 쏟아냈다.

나라고 별 수 있나. 행정은 언제나 원칙주의를 내세우고, 과업 안에서 할 수 있는 유도리있는 선택은 언제나 제한적이다. 적당한 요령도 먹히지 않는 순간들이 콱, 목을 조여오길 몇 번. 이러다 죽겠다 싶었다.


그리고 올해 들어, 나는 작년에 비해 딱 두배의 과업을 받았다.

연속프로젝트인지라 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가르쳐야 할 후배는 한 명 더 늘었다.

여러 개의 세부과업들을 동시에 진행하며, 몸과 마음이 지쳤다. 버젓이 회의를 한 후에도 모든 결정과 책임을 나에게 돌리는 이해관계자들에게 진절머리가 났다. 듣고 싶은 말만 기억하고, 본인 유리한대로 툭- 뱉어버리는 말장난도 지겹다.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업무적 관계를 뭉개려는 사람들도. 끝도 없는 과업을 겨우 쳐내고 있는 와중에도 또 새로운 프로젝트를 던져주려는 회사에게도.


그날은 딱 그랬다. 오전부터 내내 전화에 시달렸다. 협의 끝난 문제를 슬그머니 끄집어 내 원점으로 되돌리는 사람, 본인이 결정해야 할 문제를 내 책임으로 전가하는 사람, 도저히 불가능한 일정을 빡빡 우겨 진행하려고 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로 하루를 꼬박 채웠다.  그 와중에 일은 일대로 터졌다. 생각지 못한 변수가 생겨, 상황에 맞게 대처해야 할 일들이 생겨났고, 모두가 다 내 입만 쳐다봤다.


평소라면 그냥 '오죽하면...', '그래, 그럴수도 있지.' 라며 넘겼을 일들조차 목구멍에 걸렸다.

시시껄렁한 농담조차 뱉지 못한 일상이 시작됐고, 출근하는 것이 버거워졌다.


"무얼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그래. 무얼 위해. "


나는 월급쟁이이고, 힘들면 언제든 그만두면 된다.

직장인에, 월급에 옭아매지 말자. 잠시 멈춘다고 해서 영원히 멈추는 것도 아닌데 뭐, 한 템포 느리게 간다고 달라질 건 없다. 나는 지금 휴식이 필요하다. 정말 그만하고 싶다.


'부러 애쓰지 말자'는 하루의 다짐이 무색하게, 자꾸 무너져 내렸다.

마음에서 요란하게 경고를 보냈고, 나는 백기를 들었다.

정말 그랬다. 행복하지 않았다. 일이 싫은 건 아닌데, 그렇다고 더이상 견뎌내고 싶지 않았다.

끝은 또 다른 시작으로, 뫼비우스 띠처럼 또 오고, 온다. 끝은 시작이고, 시작은 또 다른 끝이다.

회사에 퇴사의사를 밝혔고, 대표의 면담이 시작됐다. 쉽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워낙 큰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었고, 지금이 가장 바쁜 시즌이니... "쉬운 일도 어렵게 한다"는 말은 그래도 하면 안됐다. 나는 회사에 입사한 후에 정말 최선을 다했다. 좋은 일을 한다는 사명감에, 일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일이 재미있었으니, 그래도 내 일이니, 나는 책임자니까. 이런 저런 이유로 늘 꾸역꾸역 내 능력치 보다 더한 일들을 해냈다. 그렇게 하다보면, 결국 업무강도는 날로 날로 세지고, 내가 해내야 할 업무 폭은 늘어나기 마련.  


여하튼, 그렇게 한 달이 또 흘렀다. 일주일 후의 면담 일정은 기약없이 한달이 됐고, 다시 한 번 퇴사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오늘 퇴사날짜를 받았다. 퇴사날짜와 함께 업무도 떠안았다. 하하.

있는 과업 잘 마무리하면 될 줄 알았더니, 퇴사 하기 정말 어렵네.


네. 그래도 퇴사합니다.


머릿속이 여전히 복잡하고, 마음이 엉켜있지만.

어쨌든 복잡하게 얽힌 마음에 스톱을 외칠 수 있어 다행스럽다.

아직 무얼 해야 다시 일상의 행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스톱이다.

 

찬찬히, 아주 찬찬히, 일상을 회복해야지.

그간 마음 한 켠에 미뤄뒀던 일기도 잔뜩 써야지.

끄적이던 글들도 정리해야지.

하루종일 책을 읽고 또 읽어야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필사해야지. 몇 번이고 좋아하는 구절을 읽고 또 읽으며 손으로 꾹꾹 눌러써야지.


그렇게 무거웠던 마음을 하나, 둘 정리하다보면 온전한 내 마음을 찾겠지.

여행도 가야지. 어설픈 영어로 손짓발짓 해가며,  낯선 곳의 생경함을 즐겨야지.

켁. 이렇게 하고 싶은거 하려고 그간 꾸역꾸역 참았나.


네. 그래서 퇴사합니다.

행복하지 않는 일상에 맞서며, 다시 일상을 회복하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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